[ET시론] AI 대전환 승부처는 현장의 암묵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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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우형 LG AI연구원 공동연구원장

거대언어모델(LLM)이 인공지능(AI)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을 열었다. 그러나, 문을 여는 것과 그 안에서 가치를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산업 현장에 AI를 적용해 생산성을 높이고 제품과 서비스 품질을 개선하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해내야 하는 대전환이다. 이 대전환에서 집중해야 할 것은 속도이며, 속도를 결정하는 것은 모델의 크기나 성능이 아니라 데이터다.

기업의 진짜 자산은 화려한 비전 보고서에 있지 않다. 생산 라인의 센서값, 실패한 실험 기록, 숙련 검사원의 미세한 판정 기준, 구매 담당자가 시장에서 읽어내는 미묘한 신호가 바로 그것이다. 전자는 시스템에 남아 있지만, 후자는 사람의 머릿속에만 존재한다. 이렇게 말로 옮기기 어려운 현장 경험, 즉 암묵지는 한국 산업이 수십년간 글로벌 경쟁력을 지탱해 온 동력이며, AI가 현장과 결합해 더 큰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 영역이기도 하다.

암묵지는 저절로 데이터가 되지 않는다. 누군가 묻고, 기록하고, 체계화해야 한다. 손자병법에 따르면 이기는 군대는 먼저 이겨 놓고 싸운다고 했다. AI 시대에 먼저 이겨 놓는 일은 데이터 구축이다. 지금 시작하는 데이터 체계화가 다음 세대가 시장을 주도하며 앞서 나갈 강력한 발판이 된다.

◇시행착오 속에 숨겨진 진정한 자산이다

가장 큰 기대 효과는 연구개발 영역에서 나온다. 신소재·신약 개발, 제품 설계는 수억개의 후보 가운데 최적화를 찾아내는 작업이다. 사람이 직관과 경험으로 좁혀 온 범위를 AI는 훨씬 더 넓고 빠르게 탐색한다. 탈모 치료용 신소재와 AI 데이터센터용 액침냉각유가 LG AI연구원의 '엑사원 디스커버리'를 통해 탄생했다.

여기서 데이터 준비 핵심은 성공 사례가 아니라 시행착오와 원인 분석의 기록이다. 연구자는 잘된 결과만 정리하는 습관이 있지만, AI에게 가장 유용한 것은 왜 실패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실험 조건과 중간 측정값, 폐기한 설계안과 그 이유까지 남겨야 한다. 연구노트를 전산화하고, 물성·조성·공정 조건의 용어를 회사 전체가 통일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LG그룹이 화학·전자·생명과학 계열사의 수십년치 실험 데이터를 그룹 차원에서 정리하고 연결한 것이 엑사원 디스커버리의 토대가 됐다.

◇제조 현장, 불완전한 표 데이터도 AI가 해결한다

제조 현장에서 AI는 이미 검증을 마쳤다. 숙련 검사원 한 사람의 판단 기준을 라인 전체가 공유하는 시대가 왔다. 이 영역의 데이터는 대부분 표 형태지만, 현장의 공정 기록, 품질 측정값, 제품 스펙을 담은 표는 교과서와 다르다. 센서 고장으로 값이 비어 있고, 수기 입력 오류가 섞여 있으며, 시스템마다 형식이 제각각이다.

LG AI연구원의 '엑사원 태뷸러'는 이런 현실을 전제로 설계된 모델이다. 빈 값이 있어도 주변 데이터와의 관계를 보고 값을 추정하며, 새로 학습시키지 않아도 처음 보는 표에 곧바로 적용된다. 글로벌 표 데이터 예측 능력 평가 탭아레나에서 구글의 최신 모델을 앞서 1위에 올랐다. 현재는 공정 데이터를 투입해 완성품 품질을 미리 예측하고, 불량 가능성을 사전에 걸러내는 데 쓰이고 있다. 배터리 셀 불량 검출 등 실증이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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탭아레나 리더보드에서 1위를 차지한 '엑사원 태뷸러'

준비 요령은 완벽주의를 버리는 것이다. 공정별 데이터 항목 사전을 만들고, 설비·시점·제품 코드를 통일하며, 검사원이 판정 사유를 객관식이 아닌 문장으로 남기게 하라. 그 문장 하나가 암묵지를 데이터로 전환하는 결정적 지점이다.

◇공급망에서 '며칠 먼저 아는 것'은 경쟁력이 된다

수요 예측 오차가 몇 퍼센트만 정확해져도 재고와 결품이 동시에 줄고, 원자재 가격을 며칠 먼저 읽으면 구매 시점이 달라진다. AI 투자 효과가 가장 빨리 나타나는 영역이다.

'엑사원 포캐스트'는 실제 산업 데이터에 2조개 규모 가상 데이터를 더해, 과거에 없던 급격한 변화까지 미리 만들어 학습했다. 그 덕분에 처음 보는 분야도 추가 학습 없이 시계열 예측 성능을 평가하는 기프트-이밸에서 세계 1위를 기록했다. LG는 원자재 가격 예측과 제품 수요 예측 등 예측을 의사결정으로 연결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흔한 실수는 회사 안의 실적만 모으는 것이다. 예측력은 외부 데이터에서 나온다. 환율·유가·경쟁사 동향·날씨·판촉 이력을 같은 시간 축에 맞추고, 확정 결과뿐만 아니라 예측치와 수정 이유까지 남기면 그것이 곧 구매 노하우를 가르치는 데이터가 된다.

◇업무 프로세스, AI 에이전트의 연료는 정리된 지식이다

AI가 질문에 답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일을 처리하는 AI 에이전트로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진화 속 성패는 모델의 성능이 아니라 회사의 업무 지식이 얼마나 잘 정리돼 있는지에 달려 있다. 실제로 LG는 기업용 업무 에이전트 '챗엑사원'을 계열사 업무에 적용해 문서 검토, 데이터 분석, 코드 작성까지 실질적인 성과를 만들어가고 있다. 현장 매뉴얼이 잘 정리된 업무일수록 에이전트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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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엑사원'을 활용한 데이터 분석 및 보고서 작성 예시

핵심은 실무자 판단 방식을 문서화해 데이터를 정제하는 것이다. 이 간극을 메우는 도구가 '엑사원 데이터 파운드리'다. 기존 문서를 읽고 업무에 맞는 질의응답 형태의 학습 데이터를 자동 생성한다. 데이터 구축 생산성은 1000배 이상, 품질은 20% 이상 향상됐으며, 국민연금공단 실증에서는 하루 1만건 이상의 전문 데이터가 만들어졌다.

이제 조직이 해야 할 일은 완벽한 매뉴얼을 쓰는 게 아니라, 흩어진 문서를 모으고, 다양한 예외 사례와 반려 사유를 함께 남기는 것이다. 정답보다 양한 판단 사례와 노하우에서 배울 것이 훨씬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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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품질 AI 학습 데이터 자동 생성·튜닝 플랫폼인 '엑사원 데이터 파운드리'의 국민연금공단 활용 사례 화면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시작해야 한다

AI 전환은 기업 역량을 한 단계 높이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루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 성패는 AI 가 마음껏 일할 수 있도록 데이터와 인프라를 준비했는가에서 갈린다. 데이터는 AI 연료이고, 컴퓨팅과 관리 체계는 그것을 태울 엔진이다.

남는 질문은 누가 이 일을 하느냐다. 암묵지는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서만 나온다. 지금 가장 좋은 성과를 내는 연구자, 최고 수준의 검사원, 시장을 가장 잘 읽는 구매 담당자가 그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예외 없이 오늘의 실적을 책임지는 사람들이다. 그 시간을 데이터로 돌리면 당장의 숫자가 흔들린다. 그래서 경영진의 결단이 없으면 데이터화는 '여력이 생기면 할 일'로 밀려나고, 그 여력은 끝내 오지 않는다. 최고 전문가의 시간 일부를 데이터 구축에 배정하는 것은 비용이 아니라 미래를 사는 투자다.

가장 흔한 실패는 잘못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준비를 기다리느라 시작하지 못하는 것이다. 요즘 AI 도구는 다소 불완전한 데이터도 유연하게 다루도록 설계돼 있다. 작은 공정 하나, 업무 하나부터 시작해 데이터를 정리하고 모델을 붙이며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을 빠르게 반복하는 것이 낫다. 이 실행이 한 바퀴 돌 때마다 데이터 품질이 올라가고 조직의 경험이 쌓인다.

한국 산업이 수십년간 현장에서 쌓아 온 암묵지는 어떤 빅테크도 갖지 못한 차별화된 자산이다. 이 노하우를 정교한 데이터로 바꾸는 조직이 다음 10년의 경쟁력을 가져갈 것이다. 서둘러 움직여야 할 때다. 그렇다고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이미 다양한 AI 도구들이 우리 곁에 있으며, 그것들을 적극 활용해 오늘도 현장의 문제를 하나씩 풀어가면 된다.

임우형 LG AI연구원장

〈필자〉 임우형 원장은 AI를 활용한 최적 의사결정 분야의 전문가로, 2020년 LG AI연구원 창립 멤버로 합류해 현재 연구소의 기술 전략과 실행을 리딩하고 있다. LG AI연구원의 핵심인 예측, 최적화, 추론 기술 고도화를 이끌며, 실험실의 연구를 넘어 산업 현장과 기업 경영에 즉시 적용 가능한 '전문가 AI 시스템' 개발에 주력해 왔다. 특히 시계열 예측, 이상 탐지, 강화학습 및 생성 모델 등 첨단 AI 분야의 연구를 주도하며 LG그룹 전반의 인공지능 전환(AX)을 기술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LG AI연구원 합류 전에는 LG사이언스파크 AI추진단에서 데이터 인텔리전스 태스크 리더를 역임하며 그룹 차원의 AI 중장기 전략 수립에 기여했다. 이전에는 삼성전자와 SK텔레콤에서 'S Voice' 및 'NUGU' 등 국내외를 대표하는 AI 플랫폼 개발을 주도하며 모바일과 통신 분야의 AI 대중화를 이끈 풍부한 현장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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