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너지 하베스팅은 오랫동안 '미래의 전원 기술'로 불려왔다. 주변의 버려진 에너지(진동, 열, 빛, 전자기장)를 긁어 모아 전기를 만드는 이 기술이 산업 현장에서 기대만큼 빠르게 확산되지 못한 이유는 물리적 원리나 인과율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이른 시기에 너무 먼 미래의 KPI(정량적 성과지표)를 붙잡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 기술의 뿌리는 1880년 피에르·자크 퀴리 형제가 발견한 압전 효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대적 의미의 에너지 하베스팅은 1990년대 MIT 미디어랩에서 체계화됐다. 닐 거션필드, 태드 스타너 같은 연구자들은 빛, 열, 진동, 전자기장, 사람의 움직임처럼 이미 존재하는 에너지를 작게 모아 소형 전자기기에 쓸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에너지 스캐빈저(Energy Scavenger)'라 불렀다. 스타너가 1996년 발표한 논문 'Human-Powered Wearable Computing'은 이 분야의 초기 이정표였다. '버려진 것을 주워 쓴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명칭이었다.
말이 바뀌면 기대도 바뀐다
그런데 용어가 바뀌었다. UC버클리 진영이 'Energy Harvesting', 즉 '수확한다'는 말을 밀어 올렸다. 2000년대 초반 DARPA(미 국방부 방위고등연구계획국)가 전장 병사의 전력 자급 프로그램인 'Soldier Power'에서 이 명칭을 공식 채택하면서 공용어로 굳어졌다. SRI(舊 스탠퍼드 연구소)의 군화형 하베스터, UC버클리 스마트더스트(먼지만큼 작은 지능형 무선센서) 연구를 위해 군사 연구비가 이 진영으로 흘렀고, 어느새 국제학술지 등의 주류 용어가 되었다.
그런데 이 용어의 변화가 미묘하게 미래를 바꾼 용어의 나비효과를 만들었다. MIT의 '스캐빈저'는 버려진 에너지를 기회가 될 때 긁어 모아 쓰자는 겸손한 현실주의였다. UC버클리의 '하베스팅'은 에너지를 계획적으로 수확해 원하는 곳에 쓰겠다는 목적론적 자신감이었다. 이 철학적 간극이 이후 수십 년간 에너지 하베스팅 산업화의 발목을 잡았다. 작은 센서가 잠깐 깨어나 신호를 보내는 기술이, 어느 순간 '배터리를 대체할 미래 전원 기술'처럼 이야기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말이 바뀌면 기대도 바뀐다. 그리고 기대가 바뀌면 KPI가 바뀐다.
신발은 발전기이기 전에 신발이어야 했다
초기의 야심찬 시도들이 기대변화의 사례다. MIT 미디어랩의 신발 장착형 압전 연구는 상징적 사례였다. 2001년 발표된 논문의 제목 자체가 'Energy Scavenging with Shoe-Mounted Piezoelectrics'였다. 핵심은 큰 전기를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걸을 때 버려지는 작은 에너지를 주워서 전자기기에 활용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반면 DARPA의 지원을 받은 SRI의 군화형 하베스터는 3mm 수준의 뒤꿈치 압축만으로 한 번 디딜 때 800mJ, 걸을 때 신발당 평균 800mW(스마트워치 사용전력의 8~12배 수준)라는 인상적인 자가발전 수치를 내놓았고, 반복 사이클 내구성도 10만 번 수준을 제시했다.
그러나 신발은 발전기이기 전에 신발이어야 했다. 실제 군화는 100만번 이상의 반복 하중, 착용감, 충격, 방수·방진, 무게, 패키징까지 함께 견뎌야 한다. 발전량을 높이면 구조가 딱딱해지고, 착용감을 살리면 출력이 줄었다. 내구성을 높이면 무거워지고, 가볍게 만들면 충격에 약해졌다. 공학에는 공짜 점심이 없다. 물리적 에너지는 공짜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착용감, 내구성, 설치 공간, 가격 중 하나 이상을 대가로 요구한다.

그럼에도 초기 시도가 남긴 유산이 있다. 보행 에너지가 실제 전력이 될 수 있다는 물리적 실증이었다. 군화형 하베스터가 대중적 상용품이 되지 못했어도, 그 문제의식은 멈추지 않았다. Bionic Power의 PowerWalk는 무릎에서, Lightning Packs는 배낭에서, SolePower의 자가발전 깔창은 신발에서 사람의 움직임을 전원으로 바꾸려 했다. 대중시장을 뒤집지는 못했지만, 신발에서 시작된 질문이 무릎·배낭·휴대형 충전기라는 다양한 형태로 재생산됐다. 초기 연구는 멈춘 것이 아니라 다른 실용 문제로 발전한 것이다.
스마트더스트의 문제는 더 구조적이었다. UC버클리의 이 프로젝트는 센서, 통신, 연산, 전원을 입방 밀리미터 패키지에 통합한다는 매력적인 비전을 제시했다. 비전 자체는 여전히 미래지향적이다. 문제는 처음 제시되었던 '1㎤ 안에서 100μW급 전력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학술적 극한 KPI가 어느 순간 산업화의 첫 번째 기준처럼 굳어버렸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이후 전세계의 연구자들은 이 KPI를 표준처럼 굳혔고 국내도 예외는 아니었다. KPI가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너무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산업 현장은 μW/㎤ 수치보다 다른 것을 먼저 묻는다. “여기에 에너지 하베스팅 센서를 달 수 있는가?”
배터리와 정면 승부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배터리를 대체하겠다는 선언이 또 다른 착시의 시발점이었다. 저전력 회로와 통신의 발전은 이미 수년 이상의 배터리 운용을 보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에너지 하베스팅이 '배터리 대체'를 내세우면 시장은 냉정하게 되묻는다. “배터리로도 충분한데, 왜 더 복잡하고 불확실한 기술을 써야 하는가?” 이 질문에 설득력 있는 답을 내놓지 못한 채, IoT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동안 에너지 하베스팅은 변방에 머물렀고 사람들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러나 상용화에 성공한 사례들은 전혀 다른 전략을 썼다. EnOcean은 2001년부터 운동 에너지 기반의 무선 스위치를 앞세워 빌딩 자동화 시장을 만들었다. 배터리 대체를 내세우지 않았다. 배선 공사가 불가능한 곳에서 기술이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Hitachi Rail은 열차 대차(바퀴 부분 프레임)의 진동 에너지를 활용해 핵심 부품을 모니터링 한다. 진동원이 풍부하고 부착 위치가 반복적인 철도 현장의 경제성과 정확히 맞아떨어진 결과다. POSITAL의 Wiegand 센서는 더 극단적이다. 상태가 급격히 반전되는 짧은 순간 발생하는 에너지 펄스만으로 배터리 없이 회전 이력을 영구 기억한다. 많은 전력이 필요 없었다. 결정적인 순간의 아주 작은 에너지면 충분했다.
산업화의 진짜 출발점은 가장 가혹한 현장이다
에너지 하베스팅이 시장이 되는 조건은 단순하다. △유선 연결이 불가능하고, △배터리 교체도 어렵지만, △데이터는 반드시 필요한 곳. 이 세 조건이 동시에 성립할 때 에너지 하베스팅은 선택지가 아닌 대안이 된다. 회전체 내부, 고전압 설비 내부, 철도 대차, 공작기 고속회전 공구 척, 고온/극저온 설비, 폭발 위험설비, 방사능 설비, 밀폐 구조물이 그런 영역이다. 이곳에서는 “배터리로도 되는데 왜?”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최근 Ambient IoT라는 이름으로 이 흐름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3GPP Release 19(6G를 위한 초기 표준)를 전후해 극저전력 디바이스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으며, 대규모 공급망·물류·리테일 적용처와 통신 표준 생태계가 결합하기 시작했다. 윌리오트(Wiliot)는 월마트 팔레트 추적에 에너지 하베스팅 'IoT Pixel'을 적용하며 배터리 없는 센서 시장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듯 보이지만 완전히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달라진 것은 적용처와 생태계다.
이제 에너지 하베스팅 산업화를 위한 KPI도 다시 써야 한다. 전력밀도 경쟁에서 △극한 환경 설치 가능성과 유지보수 회피 가치로, 배터리 완전 대체에서 △수명 연장을 위한 하이브리드로, 범용 부품 설계에서 △현장 에너지원에 맞춘 특화 해석형 설계로 이동해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기기 구동을 위한 단순 전원에서, △제한된 에너지로도 스스로 판단하는 지능형 체계로 나아가야 한다.
미래는 '어? 여기도 되네?'에서 다시 시작된다
에너지 하베스팅은 절대 과소평가할 기술이 아니다. 너무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었고, 초기의 연구성과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너무 먼 미래의 KPI에 오래 묶여 있었던 기술이다. 신발에서 시작된 질문은 무릎 하베스터와 웨어러블 전원으로 이어졌고, 스마트더스트의 꿈은 Ambient IoT라는 이름으로 돌아오고 있다. 그러나 산업화의 출발점은 언제나 단순했다.
'배터리 없는 세상'이라는 구호는 멋있지만 현장 엔지니어를 움직이기에는 추상적이다. 반면 이런 말은 구체적이다. “이 고전압 전력선에는 자가 발전 온도 센서를 붙일 수 있다”, “이 회전체는 배터리 없이 베어링 이상 여부를 스스로 알릴 수 있다”, “이 공작기 공구 척은 가공 중 발생하는 에너지로 공구 마모 상태를 판단할 수 있다” 산업은 아름다운 숫자가 아닌 이런 구체성에 반응한다.
'어? 여기도 되네?'라는 작은 경험이 쌓일 때, 에너지 하베스팅은 기술이 아니라 시장이 된다. ChatGPT와 같은 AI가 빠르게 확산된 이유도 결국 많은 사람이 직접 써보며 '어? 이것도 되네?'라는 경험을 축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AI 경험이 AI 산업화의 방향을 바꾸었듯, 에너지 하베스팅에도 경험의 축적이 필요하다. 이를 Energy-harvesting eXperience(EX)라 부르고자 한다. 산업화의 첫 번째 요소는 더 높은 전력밀도보다, 바로 이 EX의 축적이다.
어쩌면 KPI와 기대가치 문제는 에너지 하베스팅만의 이야기가 아닐지 모른다. 지금의 산업용 AI도 정확도와 벤치마크 순위로 성능을 설명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현장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얼마나 높은 점수를 받았는가보다, 제한된 시간 안에서 얼마나 필요한 판단을 했는가와 정말 필요한 반응을 했는지를 묻는다. 에너지 하베스팅의 KPI가 전력밀도에서 현장 경험(EX)으로 이동해야 하듯, 산업 AI의 KPI도 정확도 중심에서 유효 판단과 반응 중심으로 확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다음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1mJ의 에너지로 몇 번 감지하고, 몇 번 추론하고, 몇 번 반응할 수 있을까?'
오재근 | 코아칩스 대표이사
국내 최초 SAW 기반 무전원·무선 센서 개발자로, 센서·에너지 하베스팅·산업용 무선 계측 분야를 25년 이상 연구해왔다. '표면탄성파(SAW)를 이용한 에너지 포집형 무전원·무선 센서' 연구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SAW 무전원·무선 온도 센서 및 극한 환경용 에너지 하베스팅 무선 센서 등을 개발·제품화했다. 기아자동차 연구원, 호서대학교 교수를 거쳐 2007년부터 코아칩스를 이끌고 있다. 최근에는 무전원·무선 센서, 에너지 하베스팅 무선 센서 및 IIoT 센서를 기반으로 디지털 리트로핏, 온디바이스 AI를 연결한 제조 DX의 현실적 적용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