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사즉생'의 각오와 '위기 상황을 대하는 자세'를 주문한 것은 삼성전자를 둘러싼 위기의식을 환기하는 동시에 새로운 의지와 실행을 주문한 것으로 풀이된다.
'기술 초격차'가 무색하게 경쟁사에 뒤처진 반도체 사업, 모바일·가전·인공지능(AI) 등에 걸친 중국의 추격, 통상 변화에 따른 불확실성까지 가중되면서 전례없는 복합 위기에 대한 위기감을 드러낸 것이다.
동시에 이전과 다른 혁신의 필요성과 의지를 천명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핵심 사업의 경쟁력 회복과 임원의 위기 돌파 역량을 강화할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임원에 공개된 영상에는 올 초 사장단에만 전달됐던 신년 영상 메시지 중 일부도 포함됐다.
◇초격차 무색해진 위기…“저력 잃었다”
이 회장은 21세기를 주도하며, 영원할 것만 같았던 30개 대표 기업 중 24개가 새로운 혁신 기업에 의해 무대에서 밀려났다며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변화에 제때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공유했다.
이 회장은 우리 경제와 산업을 선도해야 할 삼성전자는 과연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라고 자문했다. 이어 “전 분야에서 기술 경쟁력이 훼손됐으며 과감한 혁신이나 새로운 도전은 찾아볼 수 없고, 판을 바꾸려는 노력보다는 현상 유지에 급급하다”라며 “위기 때마다 작동하던 삼성 고유의 회복력은 보이지 않는다”라고 진단했다.
삼성전자 주요 사업부 위기 요인도 공유했다.
메모리 사업부는 자만에 빠져 인공지능(AI) 시대에 대처하지 못했다는 점이, 파운드리 사업부는 기술력 부족으로 가동률이 저조하다는 점이, TV·스마트폰·가전 등을 담당하는 디바이스경험(DX)부문은 제품 품질이 걸맞지 않다는 자체 평가가 거론됐다.

이 회장은 평소 임원에게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말고 배워야 한다'는 주문을 자주한 것으로 전해졌다. 기술 진화와 시장 경쟁 변화가 빠르게 전개되는 만큼 임원이 변화 상황을 민감하게 판단해 위기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고 대처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재 영입·육성과 인사에 관해서도 “경영진보다 훌륭한 특급 인재를 국적과 성별을 불문하고 양성하고 모셔와야 한다”라며 “성과는 확실히 보상하고 결과에 책임지는 신상필벌이 오랜 원칙이다. 필요하면 인사도 수시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주요 사업 부진…시장점유율 하락
지난해 삼성전자 주요 사업 세계 시장점유율은 전년보다 모두 하락했다.
지난해 삼성전자 TV의 세계 시장점유율은 28.3%로 2023년 30.1%에서 하락했다. 스마트폰 역시 2023년 19.7%에서 지난해 18.3%로, 디램은 42.2%에서 41.5%로 낮아졌다. TV와 스마트폰은 중국으로부터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이전과 같은 지위 회복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다.
메모리사업부는 고대역폭메모리(HBM) 공급 지연 등으로 고전하고 있고, 파운드리사업부와 시스템LSI사업부는 여전히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이 회장의 발언은 임원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분발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즉, 과거의 성공 사업이라도 급변하는 시장 상황에 맞게 새로운 시각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해 달라는 주문이라는 것이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보유한 기술과 인력 등 자산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며 당장의 난관을 돌파하자는 함의도 내포됐다는 분석이다.
◇경쟁력 회복 박차 가할 듯…전열 재정비
이 회장이 '생존'이라는 단어로 위기 의식을 주문했지만, 삼성전자는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입증하고 있는 사업과 미래 성장 잠재력이 충분한 포트폴리오, 탄탄한 기술·사업 역량과 자원 등을 보유하고 있다.
앞서 삼성전자는 위기 극복을 위한 행보에 돌입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미래 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연구개발(R&D)과 설비투자에는 사상 최대 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R&D에 35조원을, 설비투자에 53조6000억원을 투입했다.
이 회장이 미래·투자·기술을 지속 강조하고 있는 만큼 종전보다 가속이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 안팎에서는 경쟁력 회복은 물론 이전보다 큰 도약을 위해 속도감 있게 기술과 자원, 인력 등 전열을 재정비하지 않겠느냐는 전망이다.
◇1993년, 그리고 2025년
삼성전자는 위기 상황을 제대로 인지해야 한다는 이 회장 의중을 강조하면서도 메시지에 대한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이 회장은 아직 사법 리스크에서 자유롭지 않은 상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 회장은 직접적으로 경영 메시지를 내놓지 않고 있다.
위기 상황에서 최고경영자의 화두는 경영의 방향타가 된다.
1993년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다. 파격적 발언으로, 근본적 변화를 주문한 것이다.
당시에 삼성은 일본 전자업체에 고전하며 위기에 직면했다.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삼성은 품질 혁신을 최우선 과제로 대대적 변화와 혁신을 지속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했다.
이재용 회장은 '생존'으로 발언 수위를 높였다. 종전과 다른 관점과 시각으로 혁신을 주저하지 말라는 주문이나 다름없다. 그동안 삼성전자가 추구한 '초격차'가 무색할 정도로 격차가 커진 반도체를 포함해 모바일·가전은 물론 중국이 앞선 AI 기술력 등에 걸쳐 삼성전자의 경쟁력을 냉철히 진단하라는 주문으로 해석된다.
과거 선대회장이 위기 의식을 고취시킬 당시 상대가 일본이었다면, 현재 삼성의 경쟁 상대는 중국이라는 게 차이라면 차이다.
선대회장과 이 회장의 발언은 위기 상황에서 나왔다.
선대회장은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삼성의 체질을 바꿨다. 32년 전과 마찬가지로 이 회장 발언을 계기로 삼성전자가 다시 한번 변화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 변화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관심이다.
배옥진 기자 witho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