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 위기 때 진짜 실력이 나온다

전기차 성장세가 둔화하면서 이차전지 산업도 주춤하는 모습이다. 끝을 모를 것 같던 전기차 돌풍이 작년 하반기 들어 힘을 잃자 확장 일변도였던 이차전지 업계도 속도조절에 나섰다.

전망은 엇갈린다. 최근 상황이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 현상)'에 불과하다는 시각이 있는 반면에 전 세계 정책적·구조적 변화로 수요 둔화가 장기화할 것이란 분석도 있다. 미래는 알 수 없지만 '변곡점'에 들어선 건 분명해 보인다.

주목할 흐름 하나가 엿보인다. 전기차 성장에 가열됐던 이차전지 시장이 정리되는 양상이다. 돛대를 올리며 야심차게 도전장을 던졌던 신흥주자들이 장벽을 넘지 못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게 리비안이다. 미국 전기차 회사인 리비안은 2025년 가동을 목표로 조지아주에 100기가와트시(GWh) 규모 배터리 공장 구축을 준비하고 장비까지 샀다. 그런데 올 들어 구매 취소와 함께 있던 장비도 되팔고 있다. 배터리 내재화를 철회해서다. 리비안은 헤어드라이어로 유명한 다이슨에 장비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전기차 업체 중 배터리 기술이 가장 앞서 있다고 평가 받는 테슬라도 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테슬라는 최근 국내 배터리 전문 업체와 전극 생산을 협의하고 있다. 이차전지 속에 들어가는 양극과 음극을 대신 생산할 곳(위탁생산업체)을 찾는 중으로, 전극 생산수율이 떨어져 외부 전문 업체의 힘을 빌리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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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코엑스에서 열린 세계 전기차 학술대회에서 관람객들이 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를 살펴보고 있다. 박지호기자 jihopress@etnews.com

세계적 브랜드의 글로벌 기업부터 신생 벤처까지 완성차 업체들은 전기차 시장 주도권을 쥐기 위해 자체 배터리 개발에 착수하거나 양산을 추진해 왔다. 전기차의 성능과 가격을 결정하는 핵심 부품이 배터리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양산능력이나 생산성에서 배터리 전문 업체를 뛰어 넘기에는 힘이 부치는 모습이다.

배터리 업계에 따르면 연간 50기가와트시(GWh) 이상을 생산할 수 있어야 손익분기점을 넘으면서 원가절감 효과가 발생한다고 본다. 50GWh는 전기차 약 100만 대를 생산할 수 있는 규모며, 최소 5조원 이상을 투자해야 한다.

전기차에 대한 수요 자체가 줄어들며 자금 사정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배터리 내재화를 끌고 가는 건 부담을 넘어, 기업 존폐와 연결되기에 당초 계획을 변경하거나 손을 떼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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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SDI가 인터배터리 2024에서 공개한 46파이 원통형 배터리 시제품

구조조정은 우호적 시장 환경의 조성으로 볼 수 있다. 치킨게임과 같은 무리한 경쟁이 사라진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다. 지금 배터리 업계 관건은 살아 남는 것이다. 전기차 수요 둔화는 완성차 뿐만 아니라 배터리 산업을 압박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SK그룹이 SK온 배터리 사업을 어떻게 재편할 지 화두가 되고 있다.

체력이 있는 곳은 버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퇴출될 것이다. 진짜 실력은 위기에서 드러난다는 말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글로벌 톱10에 모두 이름을 올려 놓고 있는 국내 배터리 3사의 진짜 실력을 주목한다.

윤건일 기자 beny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