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 SK하이닉스는 어떻게 HBM 개발이 빨랐을까

확연히 달라졌다. SK하이닉스는 '세계 최초'나 '업계 처음'이라는 표현을 절제하던 회사다. 사실 확인이 안 되거나 팩트가 틀려서가 아니다. 경쟁사이자 세계 최대 메모리 업체인 삼성전자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다. 삼성은 D램과 낸드 시장 1위다. SK하이닉스 주력 품목이 바로 D램과 낸드다. 삼성이 가격 공세에 나서면 하이닉스로서는 실적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 생긴다.

그러나 최근 SK하이닉스 공식 발표나 자료에서 '최초' 같은 표현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특히 인공지능(AI) 반도체로 꼽히는 고대역폭메모리(HBM)에 있어서 더 거침이 없다. 적극적이면서, 때론 공격적이다. SK하이닉스는 3분기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현시점 기준으로 내년도 HBM3와 HBM3E 생산량(CAPA)이 모두 솔드아웃(매진)됐고 고객 추가 문의도 들어오고 있다”며 “고객과 시장 관계자에 따르면 당사의 HBM3 캐파(CAPA) 점유율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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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하이닉스 HBM

궁금한 건 이거다. SK하이닉스가 어떻게 HBM에서는 주도적 위치에 올랐을까다. HBM도 메모리다. D램을 여러 개 쌓고 구멍을 뚫어 연결한 제품이다. 삼성전자가 1등, SK하이닉스가 2등인 현재의 D램 시장과 같은 구도가 HBM 분야에서도 형성되는 게 자연스럽다.

이유를 한 가지로 꼬집어 정리하기 어렵지만 보는 관심과 시선의 차이가 지금의 결과를 가져왔다는 판단이다. 사정을 잘 아는 인사들에 따르면 SK하이닉스 HBM 개발은 닌텐도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그래픽 성능 강화를 위해 메모리 대역폭(I/O)을 늘려보자는 내용이었다.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만드는 AMD도 움직였고, SK하이닉스도 동참했다. SK하이닉스는 게임 시장을 밝게 보고 그래픽 메모리에 힘을 쏟고 있던 터라 이해관계가 일치,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초기 HBM은 커스터마이징 제품이었다. 콘솔 게임 업체나 GPU 업체 요구에 맞게 HBM을 제작해줘야 했다. 당연히 큰돈이 안 됐다. 범용이 아닌 특수 목적의 제품이었기에 수요가 한정됐다. 지금이야 생성형 AI 영향으로 HBM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 조단위 시장이 됐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HBM은 전체 메모리의 1% 미만, 금액으로 1조원도 채 형성되지 않았다.

SK하이닉스는 그럼에도 커스터마이징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틈새시장에 불과했지만 앞으로 초고속 대용량 데이터 처리가 필요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기술 개발을 나섰고, 2013년 세계 최초의 HBM 개발 타이틀을 차지했다.

HBM 투자는 SK하이닉스라서 가능했을 수 있다. SK하이닉스에 메모리는 거의 전부지만 삼성은 메모리만 하지 않는다. 반도체를 위탁생산하는 파운드리 사업도 있고,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나 이미지센서 등을 만드는 시스템 반도체 사업도 한다. 삼성전자 같은 거대 조직이 적극적으로 대응하기에 HBM 시장은 너무 작았던 것이 사실이다. HBM 수요가 폭발적으로 는 건 생성형 AI가 등장하면서 시작된, 아주 최근의 일이다.

기술이 변하듯, HBM 열기가 언제 다시 식을 줄 모른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HBM이 전체 메모리 시장 중 15~20% 정도까지만 차지할 것으로 본다. AI 반도체가 워낙 고가인 데다가 전력 소모가 많기 때문에 데이터센터 등 대형 시스템에 한정될 것이란 전망이다. 어떤 사이클이 만들어질 지 모르지만 교훈은 있다. 준비가 돼 있을 때 기회도 잡을 수 있다는 점이다.


윤건일 기자 beny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