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차세대 전력반도체인 탄화규소(SiC) 산업 육성을 위해 추진하는 5000억원 규모 연구개발(R&D) 사업이 수요를 이끌 앵커기업을 확보하지 못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대기업이 낮은 수익성과 사업성을 이유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수요기업 연계를 전제로 한 정부 R&D가 기획 단계에서부터 차질을 빚고 있다.
정부는 지난 6월 12일 비상경제본부회의에서 '차세대 전력반도체 상용화 기술 로드맵'을 6월 중 마무리하고, 수요기업 연계형 대형 R&D 기획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대기업을 비롯한 수요기업을 앵커기업으로 참여시켜 세부 과제와 사업 구조를 구체화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8월 초 현재까지 로드맵 확정 발표는 나오지 않았다. 수요기업 연계형 R&D도 구체적인 과제 공모나 사업자 선정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 채 과제 기획과 예산 협의에 머물러 있다.
업계는 정부와 반도체산업협회 등이 대기업 참여를 설득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앵커기업을 확정하지 못한 것이 사업 추진의 병목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봤다. 중국산 저가형 화합물 반도체 공세가 거세지고 전력반도체 사업의 수익성이 상대적으로 낮아 대기업 참여를 끌어내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국내 전력반도체 수요는 약 90~95%를 수입에 의존하며 차세대 와이드밴드갭 반도체인 SiC·질화갈륨(GaN) 소자의 기술 자립률은 10% 수준에 그친다. 전기차,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신재생에너지, 전력망, 방산 등 핵심 산업의 공급망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국산화가 필요하지만, 정작 대규모 수요를 담당할 기업의 참여가 뒷받침되지 않고 있다.
정부의 전력반도체 육성 로드맵은 기술 자립률을 2030년까지 20%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다. 소재·소자·모듈·시스템 전주기를 아우르는 상용화 기술 확보와 수요기업 참여형 대형 R&D, 공공 팹·실증 인프라 활용을 핵심으로 한다.
업계 관계자는 “각 중견·중소기업이 개별적으로 대기업에 접촉해 참여를 설득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성과를 내기 어렵다”며 “정부가 직접 나서주지 않으면 '맨땅에 헤딩'식 영업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설계뿐 아니라 SiC 제조 현장에서도 대기업 참여를 유도하기 어려운 사업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공급망 다변화와 국산화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마진율이 낮아 사업 매력도가 떨어진다는 의미다. 투자 수익률이 높은 선단 공정이나 메모리 사업 수요가 큰 상황에서 전력반도체에 인력이나 내부 자원을 배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필요한 물량은 외국 기업 제품을 수입해 사용하는 것이 아직 효율적이라는 판단도 작용하고 있다.
프로젝트에 속도를 내려면 민간에만 컨소시엄 구성을 맡길 것이 아니라 정부가 앞장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개별 주체가 예산 절감, 수익성, 정책 성과 등 각자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 병목 현상의 원인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SiC 인프라가 잘 구축된 국가에서는 행정 단위별로 경쟁을 붙여 프로젝트 성과를 내도록 하는 정책도 활용하고 있다.
담당부처인 산업통상부 관계자는 “현재 기업과 계속 협의 중인 단계”라며 “정확한 시점을 특정하기 어렵지만, 세부 작업이 마무리되는 대로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형두 기자 dudu@et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