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중국의 '반도체 굴기' 견제를 본격화했다. 지난 7일 미국산 반도체 장비 수출을 사실상 금지시킨 것이다. 반도체 생산 능력을 키우려는 중국 입장에서는 큰 걸림돌을 만났다. 지난 2019년 미국이 중국 최대 통신 장비기업 화웨이를 규제했던 것과 유사하다. 이때 화웨이는 상당한 시장 영향력을 잃었다. 첨단 기술로 무장한 미국은 이번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로 글로벌 산업 지배력을 재확인하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이 모든 것을 얻는 것은 아니다. 수출 규제 대상이 되는 반도체 장비는 미국에도 중요한 시장이다.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 램리서치, KLA 등 세계 유수 반도체 장비가 미국에 포진해있다. 이들 기업의 중국 매출 비중도 20% 이상으로 적지 않다. 중국 수출 규제는 자국 기업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중국의 첨단 반도체 제조를 가로막겠다는 미국 의지로 읽힌다. '살(반도체 장비 수익)'을 내주더라도 '뼈(중국 반도체 굴기 견제)'를 취하겠다는 전략이다.
◇중국은 미국 반도체 장비 최대 고객
미국 인구조사국 국제무역데이터에 따르면 미국이 가장 많은 반도체 장비(HS코드 848620)를 수출한 국가는 중국이다. 2분기 미국 반도체의 중국 수출 금액은 11억305만달러다. 대만(10억7506만달러)과 한국(9억2706만달러)보다 앞섰다. 중국은 지난해 3분기 이후 미국산 장비를 가장 많이 사들이는 국가로 등극했다. 2019년부터 매분기 10억달러 이상을 구매한다. 미국 반도체 장비의 최대 고객이란 의미다.
지난해 미국이 중국에 수출한 반도체 장비 총 금액은 55억1800만달러다.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는 중국이라는 최대 시장을 공략하는데 '허들'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중국 판매 비중이 높은 미국 반도체 장비사부터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수출 규제 대상은 △18나노미터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 플래시 △핀펫 혹은 게이트올어라운드(GAA)펫 등 비평면 트랜지스터 구조의 16나노미터 로직 반도체 혹은 14나노미터 로직 반도체 기술과 생산 장비다. 안보 이유로 첨단 반도체 제조 기술을 넘기지 않겠다는 것 치곤 방대한 범위다. 현재 D램 대세는 14나노다. 낸드 플래시 역시 128단이 주류다. 로직 반도체는 공정이 다양하지만 5나노와 7나노 시장이 활성화 된 만큼 14나노 공정도 최첨단은 아니다. 제재 범위가 넓다는 것은 그만큼 미국 반도체 장비 수출 장벽이 높다는 의미다. 장비 업체 피해도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첨단 반도체 공정 주도권 유지하려는 미국
장비업계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중국을 견제하려는 건 미국이 그만큼 위기를 느꼈다는 방증이다. 반도체가 모든 산업의 필수 요소로 자리매김하면서 그 중요도는 한층 높아졌다. 첨단 반도체 설계와 장비 경쟁력을 앞세워 인공지능(AI), 고성능컴퓨팅(HPC), 자율주행, 우주산업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미국 전략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최근 중국 반도체 제조 업체들의 잇따른 첨단 반도체 기술 구현 소식도 미국 행보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SMIC는 최근 7나노 공정 개발에 성공, 캐나다 암호화폐 채굴 시스템에 공급했다고 알려졌다. 미국이 초미세공정에 필요한 극자외선(EUV) 노광 공정 장비 공급을 가로막았는데도 이룬 성과라 업계 이목이 집중된다. EUV 장비 대신 심자외선(DUV) 노광 장비로도 7나노 회로 구현은 가능하다. 다만 회로를 그리는 패터닝 횟수가 늘어나는만큼 비용 부담이 커진다. 시장점유율 확대를 노리는 SMIC 입장에서는 이익을 포기하더라도 첨단 공정에 진입했다는 것을 알린 계기가 될 수 있다.
메모리 분야에서는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가 128단 낸드 플래시 양산에 성공하면서 미국을 자극했다. 애플이 자사 제품에 YMTC 메모리 제품 탑재를 검토한다는 소식은 미국 부담감을 가중시켰다. 실제 거래는 성사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미국을 대표하는 애플이 YMTC를 공급망에 편입시키려는 시도 자체가 중국 반도체 기술력이 궤도에 올랐다는 것을 방증한다.
◇중국 반도체 설비투자 제한…장기화는 미지수
결국 현재 진행 중인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미국이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것이 이번 수출 규제다. 더 이상 중국이 첨단 반도체 생산 능력을 확보하지 못하도록 제대로 발목을 잡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미국 조치는 SMIC와 YMTC 등 중국 주요 반도체 제조 기업을 겨냥했다는 것이 업계 중론이다.
단기적으로 중국 반도체 제조 기업은 생산 능력 확대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SMIC 경우 지난해 45억1600만달러 규모를 설비투자(CAPEX)에 투입했다. 올해는 이보다 높은 50억달러를 설비투자에 쏟기로 했다. 설비투자 비용 중 상당 부분은 장비 구매 비용이 차지한다. 미국 반도체 장비를 많이 수입했던 중국 입장에서는 목표했던 설비투자 계획을 맞추지 못할 공산이 크다.
다만 미국의 견제가 언제까지 유효할지는 미지수다. 중국은 반도체 굴기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으로 '제조 2025'를 가속화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역량이 부족한 반도체 장비 국산화를 실현하겠다는 것이 골자다. 어느정도 성숙 공정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한 만큼 첨단 공정 자체 개발로 미국 견제를 벗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일각에서는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성숙 공정 시장을 잠식하고 첨단 공정을 추격하는 대표적인 중국 전략이 재현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