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의 고객은 누구인가?' 필자가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습관적으로 동료와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조직에서도 내 역할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최종 정립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경영학 구루들이 '왜?'라는 질문을 통해 일의 목적을 분명히 하라는 것과 같은 의미지만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일선 현장 특성상 더 직관적인 것이 좋기 때문이다.
고객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운 세상에 살고 있다. 상거래가 복잡해진 탓도 있겠지만 염치를 무릅쓰고 스스로 고객이 되고 싶은 사람이 많아진 것이 아닌가 싶다. 정부나 대기업 등 큰 조직은 제품 구매 때 공정을 최고 가치로 삼기 때문에 사양 결정, 계약 체결, 대금 결제 등 핵심 과정을 독립된 담당 조직이 수행한다. 공정을 위해 서로 견제하다 보니 자기 조직의 목적만 생각하는 폐쇄적 조직 문화가 고착된다. 효율적 제품 구매라는 궁극적 목적을 정한 협업 파트너가 각자 스스로 고객이 되어 있으니 갈등은 불가피하다. 이렇게 발생하는 '갑'의 갈등은 고스란히 최종 소비자와 '을'에게 전가돼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
소비자 중심 경제에서 고객은 오직 최종 사용자가 돼야 한다. 제품을 단순히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제품을 통한 사용자 경험과 가치를 사고파는 구독 경제 시대이기 때문이다. 성공한 혁신기업의 공통점은 모두 최종 사용자만을 고객으로 정하고, 그 외 모든 관계자를 파트너십으로 움직이게 하고 있다. 중요한 이슈일수록 파트너와 고객을 구분해서 합의를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각자 스스로 고객이라 착각하고 있거나 고객이 되고 싶어 할수록 합의는 어렵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서로 합의 아래 최종 고객을 결정하면 상생 파트너십을 끌어낼 수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온 나라가 규제 개혁을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다. 얼마 전 중소기업계도 국무총리 주재로 관련 단체장과 산업별 직능단체장이 함께 모여 규제 개혁의 필요성과 구체적 사례를 통해 해결책을 모색했다. 예정 시간을 훌쩍 넘기며 인내심을 발휘해서 최선을 다하는 총리의 모습에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지난 20여년 동안 신정부 출범 때마다 이렇게 규제 개혁에 총력을 다해도 성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최종 사용자인 고객을 배제한 채 협업 파트너 간 조정을 통해 해결책을 찾으려 하고 있지는 않을까?
소비자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스타트업과 플랫폼 비즈니스가 생겨났는데 소비자 의견은 듣지 않고 기득권과의 조정만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타다' 사례처럼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택시 이용자에게 유용한 '타다'라는 비즈니스 모델이 나왔지만 정부는 기존 산업을 보호하겠다며 '타다'를 불허했다. 결과는 이용자 고통만 더 커졌을 뿐 모두에게 참담한 실패였다. 만약 그때 정부가 양 당사자의 의견 조정 대신 택시 이용자인 고객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다가섰다면 지금쯤 상생 플랫폼에서 함께 일하고 있지 않을까?
규제 개혁의 본질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희생을 담보하는 행위다. 미래 이익이 확실치 않은 상태에서 현재 기득권을 양보하고 헌신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규제 개혁은 정부의 요구가 아니고 시장의 요구, 즉 소비자의 명령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정부는 최종 소비자 이름으로 기득권을 설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득권에 양보를 요구하지 말고 헌신을 요청해야 한다. 그들 또한 과거 어느 시점에서 기득권에 저항하며 변화를 끌어낸 주역이 아닌가.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라는 속담이 있다.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조금 더 사는 것보다 명분 있게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의미다. 아마도 위기를 겪고 있는 사업가의 심정을 가장 잘 대변하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들은 고객을 위해 헌신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 길을 택한다. 사업가만이 이해할 수 있는 고객에 대한 감정이다.
대한민국 미래가 걸린 규제 개혁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고객의 정의를 먼저 내리고 합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다음 관계자들에게 양보를 요구하지 말고 헌신을 요청해야 한다. 고객만 서로 합의되면 파트너십으로 상생 구도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위기를 기회로 전환할 수 있다. 오히려 규제 개혁을 소비자운동으로 승화시켜서 대한민국 혁신 성장동력으로 발전시켜 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임병훈 이노비즈협회장 imceo@innobiz.or.kr
◇임병훈 이노비즈협회장은= 1958년 전남 보성 출신으로, 조선대 정밀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1987년 텔스타홈멜을 설립하고 인공지능(AI), 스마트팩토리 플랫폼 구축 및 운영, 자동화 장비 및 정밀 측정기 생산 등을 하고 있다. 2019년 중소벤처기업부 모범중소기업인상을 받았고, 2020년부터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1년 2월 제10대 이노비즈협회장에 취임해서 협회 발전과 이노비즈 기업 성장을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