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과학과 기술이 브랜드가 되는 시대, 이제는 'K딥테크 브랜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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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권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이사장

오늘날 세계 무대는 국가 경쟁력과 경제안보가 맞물린 '기술패권 경쟁' 장으로 변모했다. 과거 마케팅, 디자인, 대규모 물량 공세가 기업 가치와 브랜드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였다. 그러나 기술 발전 속도 가속화와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이 맞물리며 이런 전통적인 공식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이제는 세상에 없던 독보적인 원천기술, 즉 '딥테크(Deep-Tech)'와 그 기술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고뇌한 연구자 정체성 자체가 기업의 강력한 브랜드이자 쉽게 모방할 수 없는 차별화된 가치가 되는 시대가 왔다. 바야흐로 과학과 기술이 브랜드가 되는 시대, '딥테크 브랜드' 시대의 막이 오른 것이다.

딥테크 브랜드란 단순 기술력을 홍보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과학적 발견의 경이로움과 연구자 철학을 기업 핵심 DNA로 삼아 제품과 서비스, 회사명에 이식해 전 세계 시장에 대체 불가능한 신뢰를 각인시키는 가치 창출 전략이다. 글로벌 시장을 리드하고 있는 혁신 기업들의 궤적을 추적해 보면 이 패러다임 변화의 위력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글로벌 혁신 기업들이 증명한 '과학·기술 브랜드' 위력

가장 직관적인 사례는 테슬라다. 그들은 현대 전기 문명의 기반을 닦은 천재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의 이름을 회사명과 브랜드로 채택했다. 테슬라는 차량을 인류의 지속 가능한 에너지 전환이라는 비전에 동참하는 상징으로 인식시키는 데 성공했다. 과학기술 유산을 전면에 내세운 전략이 한 세기 넘게 이어진 내연기관 중심의 자동차 시장을 흔들고, 새로운 전기차 시대를 앞당긴 원동력이 된 셈이다.

바이오 딥테크 분야의 새로운 시장을 연 모더나 역시 핵심기술을 기업명과 브랜드에 담은 사례다. 모더나라는 회사명은 'Modified'와 'RNA'를 결합해 만들어졌으며, mRNA 기반 기술이라는 기업 정체성을 상징한다. 그 바탕에는 카탈린 카리코 박사와 드루 와이스먼 박사가 이룬 기초연구의 오랜 축적이 있었다. 두 박사는 2005년 뉴클레오사이드 변형을 통해 mRNA가 유발하는 선천면역 반응을 낮출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했다. 당시 제한적인 주목을 받았지만, 이후 글로벌 연구자와 바이오 기업들이 이를 발전시키며 코로나19 mRNA 백신 개발의 핵심 토대가 됐다. 오랜 연구 축적을 토대로 모더나는 팬데믹 발생 후 1년이 채 되지 않아 백신을 상용화하며, 과학적 발견과 기초연구의 축적이 어떻게 강력한 기술 브랜드로 전환되는지를 보여줬다.

최근 인공지능(AI) 혁명을 진두지휘하는 엔비디아는 차세대 컴퓨팅 플랫폼에 은하 회전 연구를 통해 암흑물질 존재의 강력한 증거를 제시한 미국 천문학자 베라 루빈의 이름을 붙였다. 뿐만 아니라 이전부터 엔비디아는 자사 칩 아키텍처에 페르미, 케플러, 호퍼 등 과학자 이름을 붙이며 그 위대한 유산을 기업의 정체성과 연결해 왔다.

그러나 엔비디아 경쟁력은 이름에만 있지 않다. 주목해야 할 점은 엔비디아의 성과 이면에 숨겨진 R&D에 대한 집념과 끈기, 그리고 AI 연구자·개발자 생태계와의 강력한 연대다. 젠슨 황 CEO는 단기적인 시장 반응에 연연하지 않고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매년 매출액 상당 부분을 R&D에 재투자했다. 나아가 개발자와 연구자들이 GPU를 범용 연산에 활용할 수 있도록 CUDA 플랫폼과 개발도구를 폭넓게 제공해 강력한 생태계를 형성했다. 이를 통해 전 세계 우수한 연구자들을 아우르는 신경망 연구 커뮤니티가 엔비디아의 GPU를 핵심 도구로 삼음으로써 지금의 거대한 AI 부흥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2012년 토론토 대학교 제프리 힌튼 교수 연구팀이 엔비디아 GPU를 활용한 신경망 '알렉스넷'으로 이미지넷 대회에서 압도적인 성과를 거두면서, GPU가 그래픽 처리를 넘어 AI 연산의 핵심 도구가 될 수 있음이 입증됐다. 이렇듯 엔비디아의 집념과 과학 커뮤니티에 대한 존경은 오늘날 4조 달러가 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시가총액을 기록하는 기업으로 성장시키고, AI를 비롯한 과학기술 발전을 앞당긴 기폭제가 됐다.

이들 기업의 공통점은 과학적 유산과 축적된 원천기술, 그리고 장기간의 R&D 투자와 탄탄한 연구 커뮤니티를 기업의 정체성으로 삼고, 이를 시장의 압도적인 신뢰와 브랜드 가치로 전환했다는 점이다. 과거 유럽의 전통 제조 기업들이 세계 경제를 주도했다면, 이제는 과학과 기술 그 자체를 가장 강력한 브랜드로 내세운 미국의 '딥테크 기업'들이 세계 시장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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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유럽의 기업 시가총액 비교

◇대한민국 딥테크 혁신의 가속화와 그 중심의 연구개발특구

우리나라도 패러다임 변화에 발맞춰 과학기술 중심 사회로 그 구조가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자본시장의 최전선인 코스닥 시장의 판도 변화가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코스닥 시장 상위권은 주로 IT 서비스, 이동통신, 대형 유통 분야의 기업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최근의 흐름은 완전히 다르다. 지난해 말 기준 코스닥 시가총액 상위 10개 기업을 살펴보면 첨단 바이오, 이차전지, AI 기반 로봇 등 차별화된 원천기술을 보유한 딥테크 기업이 상위권을 점령하고 있다. 자본과 시장의 거대한 흐름이 이제 모방 불가능한 기술 기반 기업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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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테크 중심으로의 코스닥 시장 변화

이런 혁신의 중심에는 연구개발특구가 자리하고 있다. 과거 특구는 지역사회나 산업 현장과 유리된 채 연구에만 몰두한다는 뜻에서 '고립된 섬'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하지만 50년이라는 축적의 시간이 지난 지금 특구는 대한민국 경제 성장 심장부로 주목받는다. 실제 지난해 말 기준 코스닥 시가총액 상위 10위 기업 중 4개 기업이 대덕특구 기반이다. 여기에 특구 내 연구소·공장을 보유한 기업,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기술을 이전받아 성장한 기업, 특구 출신 창업자까지 포함하면 총 8개 사가 특구를 자양분 삼아 시장에서 압도적인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대덕특구 사례를 보면 과거 LG생명과학에서 시작된 인력들이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한국생명공학연구원으로 퍼지고, 이 탄탄한 생태계 속에서 다시 알테오젠, 리가켐 바이오사이언스, 펩트론 같은 굵직한 딥테크 기업들이 태어났다. 이들의 성공 유산이 인투셀, 트리오어, 지투지바이오 등 연쇄 창업으로 번지며 상호 협업하고 성장하는 국내 최고의 역동적 '스핀오프 생태계'를 일궜다.

특구 성공 모델은 6월 프랑스 파리 OECD 본부에서 열린 과학기술혁신정책위원회(TIP) 총회 특별세미나에서도 별도 특별세션으로 다뤄지며, 전 세계가 주목하는 'K혁신 클러스터 모델'로 국제사회 관심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구가 국가 경제의 체질을 바꾸고, 새로운 고부가가치 시장을 창출하는 대한민국 딥테크 브랜드의 거대한 발원지임을 여실히 입증하는 결과다.

◇인내 자본과 안정적 생태계로 일구는 과학기술 강국의 미래

글로벌 기술패권 전쟁에서 우리가 퍼스트 무버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현재 성과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딥테크는 오랜 시간 지속적인 R&D 투자가 누적돼야만 비로소 폭발적인 결과물을 내놓는다. 엔비디아가 10년 이상 R&D에 재투자했고, 카탈린 카리코 박사가 수십 년간 mRNA 연구를 지속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눈앞의 단기 성과에 연연하지 않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따라서 특구를 중심으로 과학적 발견이 곧바로 산업적 혁신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연구생태계를 더욱 공고히 조성해야 한다. 기술의 싹이 트고 열매를 맺을 때까지 묵묵히 받쳐줄 수 있는 인내 자본의 과감한 확충과 금융·제도적 뒷받침도 필요하다.

과학기술과 연구자의 정체성은 그 자체로 가장 강력한 국가 경쟁력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테슬라, 모더나, 엔비디아의 사례처럼, 겨레의 과학 유산인 장영실의 이름이 우주항공이나 로보틱스 같은 딥테크 기업의 브랜드가 되고 한타바이러스를 발견하고 세계 최초로 백신을 개발한 이호왕 박사의 이름이 글로벌 바이오 기업의 회사명이 되는 위대한 'K딥테크 브랜드' 시대가 오길 기대한다.

정희권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이사장 hkjung90@innopolis.or.kr

〈필자〉서울대에서 국제경제학을 전공하고 미국 미주리 콜롬비아대에서 행정학 석사를 취득했다. 제38회 행정고시로 공직에 입문한 후 과학기술 분야 정부 부처에서 28년간 근무하며 국제협력관, 과학기술정책국장, 과학기술혁신조정관 등을 역임하며 기술사업화와 산학협력, 국제협력, 국가전략기술 육성 정책 등을 이끌었다. 2024년 7월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제7대 이사장으로 취임했으며, 연구개발특구를 딥테크 전진기지이자 한국형 실리콘밸리로 발전시키기 위해 딥테크 중심 기술사업화, 글로벌 협력 강화, 협업 기반의 혁신생태계 조성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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