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굴러가는 수레는 인간의 꿈이었다. 기원전 8세기 고대 그리스 작가 호메로스는 장대한 서사시 '일리아스'에서 다음과 같이 미래를 예언한다. “불과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는 신의 명령에 따라 이곳에서 저곳으로 스스로 움직이는 기적의 순금 바퀴가 세 개 달린 놀라운 창조물을 하루에 20대를 만들어….” 상상 속에만 있던 이 놀라운 창조물은 약 2600년이 흘러 우리 눈앞에 현실화한다. 독일의 공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벤츠는 1886년 '파텐트 모토바겐'을 발명했다. 삼륜 간이마차에 1기통 954㏄ 가솔린 엔진을 얹은 세계 최초의 자동차였다. 최고출력 0.75마력, 최고속력 시속 16㎞로 비록 말보다 힘도 속도도 부족했지만 '스스로 굴러가는 수레를 만들겠다'는 인류의 꿈이 실현된 순간이었다.
◇자동차가 불러온 '파괴적 변화'
자동차는 인류의 최고 발명품으로 꼽힌다. 자동차의 탄생으로 인류는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단순한 '이동'에 허비하던 에너지를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분야에 쓸 수 있게 됐고, 이는 곧 혁신의 원동력이 됐다. 미국 포드자동차가 만들어 낸 대량 생산시스템, 즉 포디즘(Fordism)은 파괴적 변화를 가속했다. 19세기 말 자동차는 부자를 위한 사치품에 불과했다. 인류의 꿈을 현실화한 혁신적 발명가는 산업화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헨리 포드는 달랐다. 포드는 자동차산업의 잠재력에 주목했다. 실용적이고 대중적인 차를 만드는 데 집중했고, 대당 2000달러대가 넘던 가격을 850달러대로 낮춘 '모델T'를 1908년 출시한다.
포드는 이어 미시간주 하일랜드파크에 자동차 생산공장을 세운다. 자동차를 포함해 현대산업사에 가장 큰 변곡점으로 꼽히는 '조립라인'(Assembly line)의 탄생이었다. 1908년 850달러이던 모델T의 가격은 1916년 360달러로 떨어졌다. 판매량은 1908년 6000여대에서 1916년 57만7000여대로 급증한다. 1900년과 1913년 각각 뉴욕 5번가를 촬영한 사진에는 마차 가득한 길에 유일한 자동차 1대, 자동차로 꽉 막힌 도로에 마차 1대가 대비를 이루며 당시의 변화를 기록하고 있다.
◇ 자동차가 촉발한 도시의 탄생
자동차는 인류 진보와 맞물린 공간 확장과도 궤를 함께한다. 현대 자동차는 도시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로가 건축물을 잇고, 도시는 핏줄처럼 연결됐다. 포드자동차가 대중화할 즈음 현대 건축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코르뷔지에는 자동차를 현대인의 삶을 담는 '생활 기계'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1923년 발표한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라는 책에 새로운 시대정신의 정수로 비행기, 선박과 함께 자동차를 꼽았다. 위대한 도시 건축가가 자동차에 주목한 까닭은 명징하다. 이동수단 없이 도시라는 삶의 공간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본질을 파악한 것이다.
그가 제안한 선형도시 개념도에는 고층주택이 밀집해 있는 도시 위로 고가도로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자동차가 어떻게 도시를 만들었는지는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1903년 우리나라에 처음 자동차가 도입되던 때 전후로 신작로 공사가 처음 시작됐고, 6·25 전쟁 후 국가의 근대화 및 산업화를 위해 추진한 가장 큰 국가 프로젝트가 바로 고속도로 건설이었다. 철도왕국이던 미국이 도로대국이 된 것도 자동차의 대량 생산에서 기인한다.
◇자동차와 엔진, 과학과 기술
자동차는 첨단산업의 집약체이자 꽃으로 불린다. 자동차의 동력원인 '엔진'은 라틴어로 '발명'을 뜻한다. 열에너지를 기계 에너지로 바꾸는 장치 그 자체가 발명이고 새로움이라는 말이다. 공학, 공정을 뜻하는 엔지니어링도 바로 이 엔진에서 파생된 말이다. 엔지니어링은 여러 의미로 쓰인다. 분야를 막론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통합적인 해결책을 찾는 과정, 또 편리성과 경제성을 추구하는 학문을 지칭한다. 이는 엔진과도 일맥상통한다. 엔진은 시스템적인 설계이며 통합적인 솔루션이고, 요즘 말로 최고의 '가성비'를 추구하는 기계이다. 적은 연료, 적은 시간으로 어떻게 하면 고출력을 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자동차 역사에서 최대 목표였다. 요즘은 매우 자연스럽게 '과학기술'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자동차가 탄생하기 전까지 이 둘은 완전히 다른 분야였다.
◇생각하는 자동차 시대
인류는 지금도 '스스로 굴러가는 자동차'를 꿈꾼다. 3000여 년 전 호메로스의 상상과는 또 다른 의미다. 스스로 차로를 변경하고 장애물을 피하거나 앞 차량을 추월할 수 있는 자동차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꿈은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사람의 개입을 허용하는 중간단계부터 스스로 학습하고 판단하는 '생각하는 자동차' 시대까지 더 빠르게 달려가고 있다. 자동차에 권한을 얼마나 줄 것인지, 정의로운 인류 보편의 기준을 어떻게 정할 것인지 등을 활발하게 논의하고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자동차가 집, 병원, 실험실이 된다면?
한발 더 나가 보자. 지금까지 자동차는 아무리 똑똑해도 '탈것'이다. 만약 자동차와 집이 합쳐진다면? 자동차가 도서관이 되고 종합병원이 될 수 있다면? 쉽게 상상이 안 된다. 그럼 바꿔 말해 보자. 예를 들어 여러 진료과로 나뉜 작은 병원이 이동해서 한곳으로 모이고, 또 필요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각기 다른 곳에서 비슷한 과제를 수행하던 연구자, 공무원, 사회가 리빙랩으로 묶이고 실험실을 통째로 옮겨 온다면? 이것들을 어떤 공간이라고도 자동차라고도 부를 수 없는 시대를 맞을지 모른다. 뉴 노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은 우리는 '따로 또 같이'라는 오래된 명제 앞에 서 있다. 자동차라는 현대인의 제1 모빌리티는 이미 가장 개인적인 공간이며, 아이러니하게도 합쳐지기 위해 존재하는 '어떤 것'이 될 것이다.
놀라운 창조물은 파괴적인 변화를 이끌었고, 도로와 도시를 세웠으며, 과학과 기술을 통합했다. 이제 스스로 달리는 것을 넘어 생각하는 자동차가 되려 한다. 자율주행과 공유경제·온디맨드·초연결로 요약되는 미래 모빌리티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자동차산업 생태계는 제조업 중심의 수직적 가치사슬에서 서비스라는 새로운 생태계를 융합한 수평적 가치사슬로 무한히 확장할 것이다. 각국은 미래차 산업 생태계를 선점하기 위해 벌써 총성 없는 전쟁을 펼치고 있다. 밀려나는 국가는 쇠락할 수밖에 없다.
자동차가 현대산업사의 변곡점이 됐듯 미래 모빌리티는 앞으로 100년 산업사의 변곡점이 될 것이다. 세계 자동차 시장은 2020년 기준 2조7550억달러 규모로 반도체와 이차전지 시장을 합친 규모의 4배에 육박한다. 여기에 모빌리티 서비스 등 신시장이 결합한다면 미래산업은 '자동차의, 자동차에 의한, 자동차를 위한' 형태가 될 것이다. 변곡점에서 단순히 자동차를 더 팔고 덜 파는 문제에만 매몰되면 글로벌 자동차산업 5강이라는 타이틀도 과거의 영광으로 저물게 될 것이다. 미래 모빌리티 전환이라는 미증유의 과제 앞에 다시 한번 산업계 전반이 혁신의 신발 끈을 조여 맬 때가 왔다.
나승식 한국자동차연구원장 ssna@katech.re.kr
○나승식 원장은…
서울 고려고와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콜로라도대에서 정보통신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36회 행정고시를 통해 공직에 입문했다. 정보통신부 IT중소벤처팀장·지식정보산업과장, 지식경제부 기후변화정책과장·기계항공시스템과장·정보통신정책과장,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신산업정책단장을 거쳐 국무조정실 산업과학중기정책관, 산업부 소재부품장비산업정책관, 무역투자실장, 통상차관보, 무역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지냈다. 지난 2월 제12대 한국자동차연구원장에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