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부장칼럼]국가 R&D 30조원 시대, 질적 성장으로

우리나라에서 연구개발(R&D) 투자가 시작된 1963년의 정부 R&D 예산은 12억원에 불과했다. 햇수로 60년째인 올해 정부 R&D 예산은 29조8000억원에 달한다.

미국, 중국, 일본, 독일에 이은 세계 5위 규모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투자 비중으로는 세계 1위다. 돌이켜보면 보릿고개를 겪던 시절 베트남 파병 대가로 연구기관 설립을 요구했을 정도로 우리 정부는 뚝심 있게 R&D 투자를 지속해 왔다. 이는 획기적 기술 개발로 이어져 산업 발전을 견인했다.

1990년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개발한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기술은 우리나라가 이동통신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전환점이 됐다. 같은 시기 한국전자기술연구원(KETI)은 세계 최초로 HDTV 수상기용 칩셋을 개발해 우리 가전기업이 글로벌 선두그룹으로 도약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최근 이처럼 파급력 큰 R&D 성과가 사라졌다는 아쉬움의 목소리가 높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연구 현장에서는 주로 다음과 같은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R&D 예타 제도의 과감한 개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평가 기준에 다양한 기술의 특성을 반영하는 한편 절차를 더욱 간소화해야 한다. 이와 함께 조사 대상 기준(총 사업비 500억원, 국고 300억원)의 대폭적인 상향 조정도 필요하다.

예타는 본래 정부 재정이 대규모로 투입되는 생활기반시설(SoC) 사업의 타당성 조사를 위해 개발된 제도다. R&D 사업에 도입되며 일부 개선되긴 했지만 여전히 경직적인 평가 기준과 길고 복잡한 프로세스를 요구한다. 이로 인해 사업 기획 시 기술 개발 결과물의 파급력보다 사업의 통과 가능성에 초점이 맞춰지는 경우가 많다. 조사 대상이 되는 사업비 기준도 20년 넘게 그대로다. 경직된 R&D 예타 제도는 기술의 다양성과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둘째 국가 플래그십 R&D와 같이 부처별 칸막이를 없앤 대형 R&D를 늘려 글로벌 융·복합 산업 생태계를 선점해야 한다. 최근 정부 R&D가 소형화·단기화되고 있다.

그러나 분야 간 경계가 사라지는 융·복합 산업에서 산발적 R&D로는 파괴적 기술을 확보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차량용 반도체의 경우 팹리스, 파운드리, 완성차 기업은 물론 원천기술을 보유한 연구기관과 시험인증기관 등이 힘을 합칠 때 파급력 큰 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

셋째 기술 축적이 중요한 소재·부품·장비(소부장)와 주력산업의 경우 중장기 로드맵을 기반으로 생태계를 포괄하는 일관성 있는 R&D 지원이 필요하다.

반도체가 대표적 반면교사 사례다. 한때 정부는 반도체 산업 육성을 대기업 자체 역량에 의존하며 R&D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심지어 2016년에는 신규예산을 편성하지 않았다. 그 결과 중소기업 생태계는 붕괴했고, 전문인력 배출도 급감했다.

가장 뼈아픈 대목은 이로 인해 정작 부가가치가 큰 시스템반도체 분야의 주도권 확보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단기적인 관점의 R&D 지원은 생태계 전반에 걸쳐 가치사슬을 무너뜨린다.

넷째 경우에 따라 중복 R&D를 과감히 허용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중복 R&D는 예산 심의 문턱을 넘기 어렵다. 그러나 불확실성이 커지는 산업 환경에서 이는 다소 위험한 투자 전략이다. 1개 과제의 실패가 곧 국내 산업의 실패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R&D 중복 방지 논리는 파급력 높은 기술 확보 가능성을 낮춘다. 예를 들어 차세대 배터리는 향후 표준으로 채택될 후보물질 예측이 어려워 여러 경우의 수가 필요하다. 이 같은 경우 중복 R&D를 과감히 허용하자. 고난도 과제를 두고 다수의 기관이 토너먼트식 R&D를 수행하는 '알키미스트 프로젝트'가 좋은 참고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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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재정은 많이 쓰는 것보다 잘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출범을 앞둔 새 정부의 인수위 방침대로 전략적인 예산 배분이 필요한 시점이다. 때로는 과거로부터 배우는 법고창신(法古創新), 때로는 과거의 것을 버리는 제구포신(除舊布新)을 취하는 유연한 관점으로 국가 R&D 전략의 밑그림을 다시 그리자.

장영진 한국전자기술연구원 원장 yjjang@ket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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