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기술이 항상 시장의 선택을 받는 것은 아니다. 세기의 발명가 에디슨은 당시 최고 기술을 적용해 축음기를 개발했는데 그 과정에서 원가를 낮추려고 인지도 낮은 뮤지션의 음악을 활용했다. 그러나 당시 소비자에게 음질은 크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손쉽게 다룰 수 있으면서도 내구성이 뛰어난 기계로 유명하고 인기 있는 아티스트의 음악을 듣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뒀다. 결국 에디슨이 만든 기술 우위 축음기는 시장에서 실패했다.
아무리 우수한 기술이라 해도 소비자의 구매 동기나 요구를 반영하지 못한다면 그 제품은 낙오하기 십상이다. 혁신적인 기술로 찬사를 받았던 구글 글라스 역시 고객의 개인정보 문제와 과도한 소비자 가격, 미완성된 스타일 등으로 시장으로부터 외면받았다. 아마존 파이어폰 역시 고화질의 터치스크린 기술을 선보였으나 고객에게 의미 있는 가치로 인정받지 못하고 출시 13개월 만에 단종됐다. 사례를 보면 사용자 중심 사고가 시장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특히 기술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는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제프리 무어의 시장수용주기 이론에 따르면 초기 시장은 기술과 성능을 원하는 소비자가 주도하지만 주류 시장에 진입하면 얼마나 좋은 사용자 경험을 제공하는가에 따라 제품의 성패 여부가 판단된다.
PC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자 사용자 인터페이스(CUI) 기반 초기의 PC는 명령어에 익숙한 소수 전문 엔지니어의 전유물이었다. 전문지식이 없어도 마우스로 그림을 클릭해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 기반 PC가 등장하면서 PC는 빠르게 시장을 점유하며 대중화됐다. 디자인은 사용자 경험을 바탕으로 시장에 새 가치를 부여한다. 조형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사용자 욕구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이를 실현할 방법을 제공한다.
◇산업 디지털 전환에서 디자인 역할과 중요성
세계는 코로나19 유행을 기점으로 디지털 전환에 더욱 열을 올리고 있다. 여기서 디지털 기술과 사람을 연결하는 '디자인'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토스는 디자인의 힘을 이해한 대표 기업이다. 일반적인 핀테크 기업과 다르게 토스는 사용자 경험 디자인을 전면에 내세웠다. 반복해서 비밀번호를 입력하거나 복잡한 인터페이스로 사용이 어려웠던 다른 은행과는 차별화해서 사용 빈도가 높은 기능을 중심으로 단순하고 쉽게 애플리케이션(앱)을 디자인했다. 빠르고 간편한 송금을 원하는 고객의 니즈를 잘 파악한 토스는 지난해 약 8조원의 기업 가치를 인정받는 기업으로 성장하는 등 소비자 호응을 받았다.
이처럼 다양한 영역에서 디자인 활용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이 실시한 디자인산업 통계조사에 따르면 전체 산업 기준 디자인 활용률은 2020년 18.8%를 나타내며 5년 연속 증가세를 보였다. 특히 디지털 전환과 맞물려 디지털·멀티미디어 분야 디자인 활용이 65.2%로 가장 높은 활용률을 기록했다. 디자인 활용기업의 투자금액은 13조원에 달하며, 코로나로 인한 경영 악화에도 증가세를 보였다. 이는 기업이 미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디자인 투자를 지속적으로 늘리는 청신호로 받아들여진다.
◇디자인 활용 산업의 디지털 전환
한국디자인진흥원은 산업 디지털 전환에 발맞춰 디자인을 활용한 제조산업의 혁신을 돕고 나아가 디자인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디자인 주도 디지털 전환을 기획 및 진행하고 있다. 우선 기존 정보제공 시스템을 지능형으로 전면 개편해서 수요자 맞춤형 디자인 정보를 제공할 것이다. 이로써 중소기업은 필요한 디자인 트렌드 정보를 인공지능(AI) 기반으로 실시간 받게 되며, 이는 곧 상품 개발비용 절감과 시장 진입 위험의 감소 효과를 가져온다. 또 시스템 상에서 디자인 수요자와 공급자 간 거래가 가능한 환경을 조성, 상호 간 매칭을 주선한다. 나아가 가상현실(VR)·증강현실(AR) 등 메타버스 기반의 신제품 사전 검증 및 품평 서비스로 시공간 제약 없이 현실과 동일한 가상공간에서 작업 결과를 체험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다음으로 디지털 전환을 희망하는 전통 제조기업에 디자인을 활용해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지원할 것이다. 미국 아마존은 기존 대형 식료품점에 무인 자동결제 시스템 기술을 도입해서 비대면 쇼핑이 가능한 '아마존 프레시'를 오픈했다. 작년 4분기 기준 연속 두 자릿수 성장을 거듭하며 현재 미국에서만 24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사용자 중심 디자인이 활용됐다. 비대면 쇼핑 니즈 발굴, 누구나 손쉽게 조작이 가능한 스마트 카트와 매장 동선을 고려한 쇼핑 편의성 확대 등이 그것이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은 제조기업과 다양한 분야의 디자인 전문기업이 컨소시엄을 구성해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도록 지원할 것이다.
최고 수준의 메타버스 플랫폼 환경도 구축할 것이다. 세계 빅테크 기업은 메타버스 시장에서 주도권 확보 경쟁에 들어갔다. 우리나라 정부 역시 메타버스 신산업 선도전략을 발표한 바 있다. 가상현실을 실감 나게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몰입감과 상호 작용, 사용자 편의성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이는 곧 디자인 활용과 직결된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은 메타버스 공간에서 디자인 작업이 더욱 원활하게 이뤄지고 이를 더욱 현실감 있게 구현하기 위해 메타버스 협업 플랫폼을 구축한다. 또 협업 도구 개발과 지식 공유 공간을 지원하는 등 최고의 메타버스 디자인 인프라를 제공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디지털 디자인 전문인력을 양성할 것이다. 2020년 기준 디자인 인력 규모는 35만 명이며, 매년 2만명 이상의 디자인 전공자가 배출된다. 온라인 교육 플랫폼에 증강현실, 가상현실 3D 모델링 등 활용도 높은 디지털 디자인 콘텐츠를 제공해 전국 어디서나 누구든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제공할 예정이다. 나아가 대학과 대학원에 디지털 디자인 커리큘럼을 개설해 산업 현장에서 필요한 디지털 전문인력을 양성할 것이다. 매킨지는 디지털 전환을 위한 필수 요소로 최신 기술과 함께 사용자 중심 디자인 싱킹이 선정되었음을 발표한 바 있다. 디자인은 사람과 기술을 연결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기술에 숨을 불어넣어 산업을 살리는 것, 기업이 디자인을 활용해야 하는 이유이다.
필자 소개
윤상흠 원장은 1991년 제35회 행정고시 합격 후 산업자원부 자원팀장, 지식경제부 무역구제정책과장, 산업통상자원부 통상협력총괄과장과 무역조사실장 등을 역임했다. 통상·무역 분야 전문가로, 우리나라 최초의 무역 1조달러 달성에도 기여했다. 지난해 제17대 한국디자인진흥원장 취임 후 '현장에 답이 있다'는 철학에 기반해 디자인 전문기업 방문 등 현장과 소통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통상·무역 전문성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유망 디자인 기업의 해외 진출 지원에 노력하고 있다.
윤상흠 한국디자인진흥원 원장 syoon@kidp.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