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은 국력 평가의 척도이며 국가발전의 열쇠입니다. 서울 연구개발단지는 한국 과학기술 개발의 중추가 될 것입니다.” 1971년 4월 14일 오후 2시. 서울 동대문구 홍릉 임업시험장 부지에서 열린 서울연구개발단지 기공식장에 박정희 대통령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김학렬 부총리와 김기형 과학기술처 장관,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홍릉 임업시험장(현 국립산림과학원)에서 서울 연구개발단지 기공식을 거행했다.
박 대통령은 치사를 통해 “과학기술 혁신과 경제발전, 자주국방을 선도할 한국 과학기술 개발의 중추기관이 입주한다”며 “창의적인 과학두뇌 양성과 선진 과학기술을 과감하게 도입해서 우리만의 독자 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통해 조국 근대화와 과학기술 발전을 이룩해 달라”고 당부했다. 박 대통령은 “한국과학원(현 KAIST)이 외국의 어느 이공계 대학에 비해 손색없는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 두뇌 양성기관으로 발전해 달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임업시험장이 자리 잡은 31만4000평 대지 가운데 약 20만평을 서울 연구개발단지로 조성해서 이미 입주한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외에 한국과학원, 한국개발연구원, 국방과학연구소 등 3개 연구기관을 새로 입주시키기로 했다. 정부는 이곳을 한국 과학기술 개발의 중추단지로 육성한다는 방침이었다.
이날 기공식은 김기형 과학기술처 장관의 개발단지 연혁 소개, 박 대통령 치사, 기공식 순으로 진행됐다. 박 대통령은 기공식 후 환한 표정으로 김학렬 부총리와 김기형 과학기술처 장관과 함께 기공 첫 삽을 뜨고 건설계획 현장을 둘러보며 세부 계획을 보고 받았다. 김학렬 부총리는 이보다 앞서 “정부는 3개 연구기관에는 외자 1000여만달러와 내자 124억원 등 모두 250여억원을 투입한다”며 “이들이 입주하면 5개 자연 및 사회과학계 최고 연구기관이 상호 협력하면서 인력 개발과 각종 연구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과학기술처와 한국과학원은 기공식이 끝나자 후속 사업 추진에 속도를 냈다. 먼저 600만달러 차관을 지원받는 일부터 진행했다. 미국 국제개발처(USAID)의 차관은 무상 지원이 아니었다. 정부가 협정 조건에 따라 매년 일정액을 상환해야 할 돈이었다. 정부는 6월 USAID에 한국과학원 설립을 위한 600만달러 차관 신청서를 제출했다. 해너 USAID 처장은 그동안 수차례 600만달러 차관을 약속한 바 있어 USAID는 신청서를 받자 이를 즉시 승인했다. 이제 다음 일은 한국과 미국 간 차관협정 체결이었다.
경제기획원은 8월 말께 차관협정 안건을 국무회의에 상정했다. 외국과의 차관협정 체결은 국무회의 의결 사항이었다. 협정서는 10개 항목으로 작성했다. 돈을 빌리는 만큼 차관 금액과 이자율, 상환기간, 사업에 대한 서약과 보증, 해양 선적, 해양 보증, 차관 조건 등을 구체적으로 명기했다. 한·미 간 차관 협정은 9월 16일 경제기획원 회의실에서 체결했다. 이를 위해 해너 처장은 다시 한국에 왔다. 이날 한국 측에서 정부 대표로 김학렬 부총리, 미국 측 대표로 존 해너 USAID 처장, 사업주인 한국과학원 대표로 이상수 원장이 협정서에 서명했다.
차관으로 추진할 사업은 과학원 운영에 필요한 실험기기 300여종의 구입과 연구 서적, 관련 기술용역 등으로 제한했다. 권원기 전 과학기술처 차관(당시 인력담당관)의 회고. “미국과 차관협정서 체결은 일사천리로 진행했습니다. 해너 처장이 한국을 지지하고 성원했기 때문입니다. 차관 상환 조건은 10년 거치, 30년 상환이었습니다. 협정서에 따라 정부는 1년에 두 번 이자를 지불하고 첫 10년간 이자는 2%, 나머지 30년간 이자는 3%를 지불키로 했습니다. 또 구매 이외 재정에 대해서는 정부나 한국과학원이 USAID에 법무부 장관 의견서와 한국과학원의 기술 지원 활동에 대한 필요성 및 범위를 포함한 계획서, 기술 지원을 위한 한국과학원과 계약자 간 계약서 초안을 3개월 안에 제출키로 했습니다. 정부는 USAID 차관으로 구입한 기기에 대해서는 면세 혜택을 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차관으로 구입한 기기를 이용해서 생산한 품목은 수출을 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과학원은 7월 26일 신축 건물 설계를 마치고 11월부터 공사에 착수했다. 건설 공사는 예상보다 진도가 느렸다. 신축공사가 늦어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대안으로 공병단 파견을 생각했다. 박 대통령은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신축공사에 군통제단을 1967년 3월 13일부터 공사가 끝날 때까지 현장에 파견한 일이 있었다. 군통제단은 토목, 건축, 기계, 전기 등 분야별 전문가 영관급과 위관급 장교 6명으로 구성했다. 이들은 현장에 상주하면서 연구소 직원과 함께 공사를 독려하고 건설 현장 인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했다.
이와 관련한 뒷이야기 하나. 이상수 원장의 생전 증언이다. “어느 날 청와대 비서실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공사 진행이 지지부진하자 한국과학기술연구소 공사를 담당했던 공병단을 동원해야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전해 왔습니다.” 이 원장은 '과학원 건설에 공병대를 동원하면 자칫 큰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대학가는 박 대통령 통치에 반대하는 시위가 잇따랐다. 이 원장은 급히 대통령 면담을 신청하고 청와대로 들어가서 박 대통령을 만났다.
“이 원장, 무슨 일이오.” “각하, 과학원 공사 현장에 공병단을 파견하면 안 됩니다. 대학은 예나 지금이나 순수해야 합니다. 만에 하나 학생들과 자칫 마찰이라도 생기면 과학원 설립 취지가 무색해질 수 있습니다. 공병단 동원을 재고해 주십시오.” “알겠소.” 박 대통령은 선뜻 이 원장의 건의를 수용했다. 이후 공병대 파견에 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과학기술을 폭넓게 이해하고 과학자 의견을 존중한 지도자였다.
과학기술처는 9월 11일 한국과학원 이사회가 의결해서 제출한 한국과학원 5개년 사업계획서를 승인했다. 5개년 계획은 1971년부터 1975년까지 과학원이 추진할 각종 사업계획을 구체적으로 담은 청사진이었다. 1973년까지 7개 학과를 개설하고 학생 정원은 1976년까지 박사과정 105명, 석사과정 210명으로 한다고 밝혔다. 전임교원은 1975년까지 56명을 확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한국과학원은 계획에 따라 9월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학과와 전공 분야 선정 원칙을 마련했다. 원칙은 △힌국과학원은 이공계 대학원임을 확고히 한다 △기술 혁신을 선도할 인재 양성을 위한 학과와 전공 분야를 우선한다 △기초 공학을 중시한다 △전공 분야를 개발해서 시대적인 수요 변동에 부응할 수 있도록 신축성을 갖는다 등이었다.
한국과학원은 원칙에 따라 개설 학과와 교육 내용, 규모, 시설, 산·학 협동, 졸업생 취업문제 등에 대한 학과별 조사연구사업을 진행했다. 과학원 전기 및 전자공학과 1호 교수 나정웅 박사의 회고. “당시 조사는 학과 설립의 타당성과 교육과정, 졸업생 취업 등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검토했습니다. 당시 전기 및 전자공학과 조사 책임자는 박송배 박사였고, 저는 간사였습니다. 당시 과학원을 미국 MIT와 같은 과정으로 교육하기 위해 구체적인 안을 만들었습니다. 기존 대학원 교육에 비해 파격적인 교육안이었습니다. 졸업생 취업을 위해 전국 산업체와 연구계, 학계 등을 대상으로 채용 설문조사도 했습니다.”
과학원은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7개 학과를 개설키로 최종 확정했다. 7개 학과는 △기계공학과 △산업공학과 △생명공학과 △수학 및 물리학과 △전기 및 전자공학과 △재료과학과 △화학 및 화학공학과 등이다. 이 가운데 생명공학과는 임업계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개설키로 했다. 1971년 한 해를 닷새 남겨둔 12월 27일 과학기술처는 '한국과학원 학사규정'을 마련해서 차관회의를 거쳐 국무회의에 안건으로 상정했다. 국무회의를 거친 학사규정은 12월 31일 대통령령 제5926호로 공포됐다.
학사규정은 한국과학원 교원 자격과 학위, 과정별 수업, 학과, 교과, 학생 정원과 입학 자격 등에 관해 필요한 사항을 구체적으로 정했다. 과학원은 정년 퇴임자 가운데 과학원 발전에 기여한 교원은 명예교수로 추대할 수 있게 했다. 과학원 수업일 수는 연간 180일 이상으로 하고, 학기는 2학기제를 원칙으로 했다. 과학원은 또 입학 문호를 개방해 학사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외국인 입학도 허용키로 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