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시장 먹이사슬과 지식재산(IP):법·정책·경쟁의 응집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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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이 걸렸다. 5월 들어설 새 정부 정책 청사진을 그릴 대통령직 인수위 1차 전체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책상이 아닌 현장'을 보라고 당부했다. 대선 과정에서는 오직 '국익'을 국정운영의 궁극적인 가치로 삼겠다는 의지와 함께, 디지털·데이터·플랫폼 등 경제 패러다임 변화에 주목하며 '과학기술 강국' '민간 주도 성장' '규제 개혁'을 강조했다. 다 옳은 진단이고 방향이다. 불현듯 10여년간 필자가 시장 '현장'에서 목격한 몇 가지 장면이 주마등처럼 기억을 스쳐 지나갔다.

2014년 4월 미국 새너제이 연방지법. 애플은 삼성전자 갤럭시폰이 아이폰 '둥근 모서리'(여기서 혀를 차는 분들도 있겠다) 디자인 특허 등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2조원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애플 변호인은 “삼성이 경쟁의 지성이 아니라 '대놓고 베끼기'라는 어둠의 세계로 들어섰다”며 날을 세웠다. 삼성 측은 “애플이 배심원 여러분의 지성을 모욕하고 있으며, 그들이 '시장'에서 잃은 것을 '법정'에서 얻으려 한다”고 강하게 치받았다.

2020년 7월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주휴스턴 중국총영사관 폐쇄. 국제정치와 함께 세계 시장과 무역을 둘러싼 양국 주도권 경쟁 연장선이었다. 당시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다짜고짜 “중국이 미국과 유럽 지식재산권(IPR)을 '도둑질(theft)'하고 있어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쏘아붙였다. 바통을 이어받은 바이든 행정부 역시 미국 기업 IP 보호에 대한 중국 정부 노력이 부족하다며, 도용과 위조 등 디지털 불법복제 범죄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겠다고 압박 수위를 높였다.

2022년 3월 유전자편집 가위 크리스퍼(CRISPR-Cas9) 발명에 대한 미국 특허심판원(PTAB) 항소심 평결. 생물학 혁명으로 불리며 2020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뒤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메신저리보핵산(m-RNA)를 이용한 코로나19 진단기술 개발에 사용된 기술이다. 이 특허를 둘러싸고 UC버클리대가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하버드대를 상대로 제기한 분쟁이 2018년 1심에 이어 다시 피고 측의 승리로 귀결됐다. 이에 따라 UC버클리대에서 이미 특허 라이선싱을 받은 바이오 기업에 불똥이 튀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양 기관은 우리나라 T사가 2013년 미국 특허청에 출원한 관련 특허에 대해 저촉심사를 요청해 현재 진행 중이다. 어제의 적수도 제3의 공통 적수가 나타나면 언제든 같은 배를 탄다.

2012년 9월 미국 연방순회 항소법원 하이힐 빨간 밑창(red sole) 상표권 판결. 입생로랑을 상대로 크리스찬 루부탱이 제기한 자사의 하이힐 빨간 밑창에 대한 상표권 침해 및 판매정지 청구 소송에 대해 1심을 뒤집고, 밑창과 윗부분 대비 부분에 대해서는 상표권(trademark)을 인정했다. “아니, 세상에 '둥근' 모서리도 부족해서 이젠 자기들이 발명한 것도 아닌 '색깔'에까지 브랜드권을 달라니!”라며 또 다시 탄식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기업에는 모두 생존을 위해 물어뜯는 시장경쟁, 이른바 '개싸움 세상'(a dog-it-dog world)의 치열한 '현장'일 뿐이다. 한편 루부탱이 네덜란드 패션기업 반호렌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는 2018년 유럽사법재판소(ECJ)가 “색깔을 포함한 상품의 모양은 특정 브랜드의 독점적 권리가 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란 말인가.

이 외에도 예를 찾자면 숨이 가쁠 지경이다. 2010년 오라클이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자바(JAVA) 침해를 이유로 구글에 10조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10년을 끈 후에야 2021년 4월,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결론이 난 저작권 소송은 또 한 편의 IP 드라마였다. K-팝, K-드라마, K-무비 등 한류 콘텐츠의 세계적 인기에 힘입어 만년 적자이던 우리 IP 무역수지가 2019년 하반기에 이어 2020년 상반기 8억5000만달러 흑자를 기록했다는 고무적 뉴스.

하지만 이도 잠시, 이번엔 방탄소년단(BTS) 등 콘텐츠의 무단 도용과 굿즈(goods) 불법 제조·유통, 넷플릭스 서비스가 없는 중국에서 '오징어 게임' 대규모 불법유통과 상표 무단출원이 증가하자 최근 넷플릭스가 중국의 대형 온라인 쇼핑몰에 IP 침해에 책임을 묻겠다며 경고하고 나섰고, 우리 외교부와 문체부가 이례적으로 중국 당국에 문제를 제기하고 침해에 적극 대응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앞서 1998년 우리나라 새한정보시스템과 디지털캐스트가 공동 개발한 세계 최초 MP3 플레이어는 부실한 원천특허 관리로 인해 2001년 애플 아이팟 출현으로 시장 뒤안길로 사라졌다. 기회손실만 3조원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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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살펴본 '현장' 사례가 우리에게 얘기하는 것은 무엇일까. 지난해 말 오션토모 분석에 따르면 S&P 500대 기업 자산 중 90%가 특허·브랜드·콘텐츠·소프트웨어·데이터 등 IP 중심 무형자산(intangible assets)이다. 그런데 변화 배경에는 1970년 이후 본격적인 녹슨 사양산업(Rust Belt)의 길로 들어선 전통 제조업에 대한 미국의 깊은 회의와 고민이 있다. 미국인은 '감자칩'은 알아도 '반도체칩'은 모른다는 자조도 한몫했다. 일본에 이어 중국의 급격한 부상 속에 미국에 남은 시장경쟁의 유일한 무기는 IP뿐이었다.

과감한 정책 변화가 뒤따랐다. 2008년 제정·시행된 '지식재산권 자원·조직 우선화법'을 필두로 해 백악관에 'IP 집행조정관'을 둬 방대한 'Pro-IP' 국가전략을 체계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이 전략은 극적으로 성공했다. 국가경제 절체절명 순간을 맞아 IP를 시장 '먹이사슬' 피라미드 최정점에 올려놓았고, 이제 IP 없이는 제조, 판매, 수출, 투자유치도 불가능하도록 시장 질서와 패러다임을 바꿈으로써 꺼져가던 세계 경제 주도권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이후 자유무역협정(FTA) 등 양자·다자 국제협정에서 IP 관련 조항은 언제나 미국 최우선 관심사였고, 2011년 국회 비준을 거쳐 이듬해 발효돼 올해 3월로 10주년을 맞은 한·미 FTA 협상도 예외는 아니다. 당시 언론은 양국 수석대표 이름을 따 '웬디와 종훈의 전쟁'이라고 부르며 이른바 미국 '미키마우스법'에 의해 창작자 저작권 인정 기간이 사후 50년에서 70년으로 연장된 점에 주목하기도 했다. 국제통상에서도 전통적인 반덤핑·관세 중심 무역규제가 IP·기술 장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른바 '특허괴물'로 불리는 특허관리전문 비실시기업(NPE)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기업이 사흘에 한 번꼴로 특허소송 공격을 받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일본도 이미 2002년에 '지적재산입국'을 표방하며 '지적재산기본법'을 제정했고, 이듬해 총리를 본부장으로 하는 지적재산전략본부를 설치했다. 미국과 함께 'G2'로 발돋움하려는 중국 정부 역시 '짝퉁 왕국'이라는 오명을 씻고 새로운 경제질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자각하게 됐다. 2005년 '지식산권전략제정위원회'를 설치하고 IP 보호를 강화하는 등 국가정책과 사법제도의 변화에 적극적 모습을 보여왔다. 물론 한국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2011년에 '지식재산기본법'을 제정·시행했고 대통령 소속 '국가지식재산위원회'를 설치했다. 국무총리와 윤종용 삼성전자 전 부회장 공동위원장 체제로 산하에 범부처 전략기획단도 두었다. 필자도 초대 단장으로 4년간 밤낮없이 뛰었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까. 이 질문은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기도 하고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이는 데 대한 아쉬움이기도 하다.

IP는 경제 성장 요체다. 나아가 윤 당선인이 강조한 '공정 경제' 한 축이기도 하다. 규모가 작은 중소·벤처기업은 IP 침해에 훨씬 더 취약하고, 대기업과 소송에 휘말리면 감당하기도 버겁다. 공정의 가치를 위해 독점 시장 지배력이 광범위한 표준필수특허(SEP)에 대해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비차별적인 라이선싱을 보장하는 '프랜드(FRaNd)' 규약도 확립돼 있다. 문화·예술 분야 콘텐츠 저작권은 산업적 활용 외에 교육·전수와 문화 재확산을 위한 '공정 이용'이라는 정책 목표 역시 매우 중요하다. '구름빵' 사건처럼 창작자 무지와 기업 탐욕에 의한 불공정 사례는 여전히 주위에 많다.

사족 하나. 최근 '경제안보' 논의가 활발해 지고 있다. 윤 당선인도 정책 의지를 표명한 바 있다. 일본 소·부·장 수출규제와 중국발 요소수 사태를 겪으며 얻은 학습효과일 터이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핵폭탄급 경제제재를 받은 러시아 정부는 불과 며칠 전 한·미·일·영·EU 등 '비우호적 국가' 특허 보유자의 발명·산업 디자인 등을 러시아 기업이 무단 사용해 얻은 이익에 대한 보상·배상 책임을 면제하는 정부령을 발표하고 특허법을 개정했다. 이에 발끈한 미국은 러시아 특허청(RosPatent) 및 유라시아특허기구(EAPO)와 업무관계를 끊고, 미국 특허청(USPTO)을 통한 러시아의 글로벌 특허심사하이웨이(GPPH) 참여 지위도 박탈하겠다고 밝혔다. 총성과 미사일이 난무하는 우크라이나전은 언젠가 끝날 테지만 IP를 둘러싼 '소리없는 전쟁'은 일상에서 더욱 격화될 것이다.

앞으로 50여 일 통의동과 삼청동 인수위 사무실 창문 불빛은 계속 밝혀져 있을 것이다. 국가 미래 방향을 설계할 고담준론이 오갈 것이며 인수위원과 전문가, 부처 파견 공무원이 과연 국가와 국민 이익이 무엇인지를 놓고 '영끌'하는 모습을 보며, 지난 2년간 코로나의 무게로 숨이 턱까지 찬 국민과 우리 기업은 조심스러운 기대와 희망을 품고 조용히 지켜볼 것이다. 이전 정부도 그러했다. 미래 먹거리를 놓고 녹색성장, 창조경제, 혁신성장 등 굵직굵직한 화두를 던졌지만 결국 현란한 수사(rhetoric)만 요란했고 결과는 초라했다. 거대담론은 있었으나 시장에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할 실효적인 정책 설계가 부족했던 탓이다. 그럼에도 이번 대선 과정에서 IP 전략에 대한 직접적인 논의는 없었고, 아쉽게 무거운 정책적 침묵만 귓가를 맴돌았다.

우리 경제의 근본 체질 전환, 즉 디지털 경제로 진전함에 있어서 왜 미국 행정부·의회·기업이 그렇게 한 몸처럼 IP에 사활을 걸고 집요한 국가전략을 펼쳐오고 있는지, 왜 중국과 IP를 두고 거친 말을 써가며 입씨름을 벌이는지, 왜 세계 각국에서 적도 아군도 없이 소송이 벌어지는지 깊이 들여다볼 일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지식재산과 연구개발(R&D), 금융 투·융자, 기술사업화, IP 보호와 확산의 균형 등 손봐야 할 곳이 많다. 더구나 우리가 일상에서 떼놓을 수 없게 되어버린 스마트폰은 물론 자율주행차, 인공지능(AI) 로봇산업 등에서 더욱 가속화될 기술과 문화의 융합, 즉 하드웨어·소프트웨어·네트워크·데이터·콘텐츠 융·복합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게 될 것이다. 이에 대비해 새 정부는 기능적 통합이든 실효적인 조정 메커니즘의 마련이든, 다양한 융·복합 신지식재산을 종합적으로 조망하고 전략을 세워 집행할 수 있는 거버넌스 재정립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시장이 증언하는 '현장'은 우리에게 말한다. 시대의 거시 흐름과 변화에 올라타지 않으면 뒤처질 것이라고. 우리 국민의 뛰어난 문화적 창의성과 두터운 과학 기술 역량도 결국 시장에서 부딪치게 되는 궁극적인 접점은 지식재산이 될 것이다. 지식재산이 경제의 전부는 아니지만 지식재산을 떼어 놓은 경제는 생각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IP는 법·정책·경쟁의 모든 요소가 하나의 결정체(crystallization)로 응집된 시장 먹이사슬의 최정점이며, 미래 생존게임 룰이다. 지난해 여름 다른 기고문에서 필자는 '오캄의 면도날'(Occam's Razor)을 들어 복잡한 가정과 막연한 기우는 걷어내고 당면한 목적만을 명쾌하게 보자고 했다. 인수위의 지혜와 명철을 믿는다. 21세기 시장에서 국익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고기석 한국지식재산서비스협회장 president@kaips.or.kr

<프로필>

고기석 회장은 서울대 법과대학와 행정대학원, 하버드대 케네디대학원 졸업했다. 하버드대 케네디대학원 티칭펠로, 한국과학기술원(KAIST) 상임감사, 외교통상부 외신대변인, 대통령실장실 선임행정관, 국회예산정책처 사업평가국장, 국무총리실·국무조정실, 정책분석국장 및 특정평가국장, 국무총리실·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가지식재산위원회 전략기획단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지식재산서비스협회장,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석좌교수, 특허청 디지털지식재산포럼 위원장, 에어비앤비코리아 정책부문 책임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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