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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 한국원자력연구원 부원장

SF영화나 첩보영화, 애니메이션 등은 시대를 앞서가는 기술을 선보이며 보는 이들의 환성을 자아내고 가슴을 뛰게 만든다. 많은 영화들 중 공학자들의 호기심을 극도로 자극하는 영화로 단연 '어벤져스'를 꼽을 수 있다. 아직까지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영상은 2012년 개봉된 어벤져스 1편에서 거대한 항공모함이 공중으로 부양하는 장면이다. '어떤 에너지를 사용하면 저렇게 거대한 항공모함을 띄울 수 있을까? 만약 원자력으로 가능하다면 원자로와 동력 전달 시스템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지?' 숨 막히는 전개를 뒤로 하고 머릿속에는 이미 여러 가지 질문들로 가득 찼다.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 나만의 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했던 그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2014년 말, 어벤져스 1편에서 나온 '공중 항공모함'의 기억을 뒤로한 채 바쁜 생활을 보내던 중 신문 기사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미국 국방부가 대형 항공기를 개조해 하늘을 나는 항공모함을 만드는 방안을 찾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발표를 실은 신문 기사는 '공중 항공모함'보다 '수중 항공모함' 실현 가능성이 더 크다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원자력을 연구하는 공학자로서 '공중이든 수중이든 무슨 상관이랴,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원자력 시스템을 개발하는데 한몫할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없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미소를 머금었던 날이었다.

2019년 연말이 다가오면서 예전 호기심을 되살리고 싶은 마음에 어벤져스 1편을 다시 보다가 놀랐던 장면이 있었다. “스타크 타워가 지속 가능한 청정에너지의 대명사가 될 거야.” “그거야 아크 원자로가 제대로 작동할 때 이야기죠.” 아이언맨인 토니 스타크와 여자친구인 페퍼 포츠가 나눈 대화다. 이 대화가 끝난 후 뉴욕 맨해튼 중심가에 있는 스타크 타워는 전력망에서 완전히 분리되고, 아이언맨이 말한 대로 아크 원자로가 스타크 타워 전력을 공급하기 시작한다. '공중 항공모함'이 아니라 '전력망에서 완전히 독립된 스타크 타워'에 놀란 이유는 현재 우리 원자력계가 추구하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워싱턴DC에서 활동하고 있는 '서드 웨이(Third Way)'라는 싱크탱크는 2017년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앞으로 개발될 선진화된 원자로에 대한 청사진을 내놓았다. 원자로가 극지방, 오지, 사막, 도심, 산업 단지, 해군 기지, 데이터 센터 등에 배치된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한 이 청사진은 도심에서 떨어져 있는 원자력발전소가 아닌 마치 스타크 타워의 아크 원자로처럼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는 공간에 들어와 있다. 이런 생각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일까? 아니면 가까운 미래에 실제로 볼 수 있는 현실이 될 것인가?

얼마 전 미국 에너지부는 1.5메가와트(㎿e)급 초소형원자로를 개발 중인 오클로(Oklo)라는 회사가 아이다호국립연구소 부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흥미롭게도 오클로가 개발 중인 원자로 이름은 '오로라'이다. 이는 오클로 원자로에 대한 환상을 입혀주는 효과도 있지만 서드 웨이가 제시한 청사진 중 극지방, 오지 즉 오로라가 잘 보이는 지역에 이 원자로를 배치하려는 오클로의 강한 의지도 엿볼 수 있다. 그러면 원자로를 도심에 배치하는 희망은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며칠 전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는 현재 개발 중인 선진원자로의 용량과 특성을 반영해 과거 40년 전에 10마일로 규정된 비상계획구역을 재검토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스타크 타워가 현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아진 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최근 개봉된 겨울왕국 2편의 주제곡인 '숨겨진 세상(Into the Unknown)'은 2020년대를 맞이하는 우리 원자력계에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영화 속 엘사를 부르는 의문의 목소리는 공학자인 우리에게는 영감, 즉 창조적인 자극으로 대변될 수 있지 않을까?

사물인터넷(IoT), 가상현실(VR), 로봇공학, 인공지능(AI) 등 4차 산업혁명이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더욱 부풀어 오르고 있다. 이 시점에서 과거 숨겨진 세상이었던 원자력을 연구하는 우리를 강하게 이끄는 새로운 숨겨진 세상은 무엇일까?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인류의 노력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2020년을 맞이하며.

김영기 한국원자력연구원 부원장 ykkim1@kaer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