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 중앙처리장치(CPU) 부족 현상이 장기화하면서 국내 PC 업체의 생산 차질과 매출 감소가 심화되고 있다. 거의 1년째 공급난이 지속되면서 미리 CPU 재고를 확보한 글로벌 PC 제조사마저 타격을 받고 있다. 특히 국내 중소 PC 업체들은 1년 전에 겪은 최악의 'CPU 가뭄'을 다시 마주했다. 주력인 공공시장 입찰에 제동이 걸려 CPU를 소량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일부 업체는 제품 라인업을 바꾸거나 AMD 제품을 택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1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외 PC 업체들이 인텔이 생산하는 14㎚(나노) 공정 기반의 CPU 부족으로 매출 감소와 생산 차질 문제에 직면한 것으로 보인다.
인텔 CPU 공급 부족 문제는 올해 말 갑자기 발생한 일이 아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14나노 기반 제품이 전례 없는 품귀 현상을 빚으면서 국내 중소 PC 업체가 직격탄을 맞았다.
그러나 올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특히 4분기 들어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주장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연말 정보기술(IT) 시장 성수기로 판매량이 올라가고 내년 1월 윈도7 서비스 종료 이슈로 PC 교체 수요까지 몰리고 있지만 CPU 물량이 부족, PC를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처음 불거진 품귀 현상과 다른 것은 글로벌 PC 제조사도 직접 피해를 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세계 PC 시장은 휴렛팩커드(HP), 레노버, 델, 애플, 에이서 등 5대 업체가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인텔 CPU 기반으로 제품을 만드는데 이 문제가 매출에 직접 타격을 줄 것이라는 입장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다. 그동안 업계에서는 비교적 낮은 가격의 프로세서 수급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최근 고사양 CPU 공급에도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점이 눈에 띈다.
최근 델 고위 관계자는 “CPU 수급이 분기마다 나빠지고 있어 최고 사양의 PC 제품과 기업용 PC 제품 생산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회계 기준 2020년도 예상 매출 범위를 927억~942억달러에서 915억~922억달러 수준으로 하향 조정했다.
이밖에 HP 및 레노버 관계자들이 최근 공식 자리에서 수개월 동안 인텔이 CPU 부족 현상을 해결하지 못해 늘어나는 PC 수요를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인텔이 지난 11월 20일(현지시간) 공개서한까지 내며 고객사 달래기에 나선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더군다나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국내 PC업계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PC업계에서는 지난해 겪은 최악의 공급 부족 상황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고 강조했다.
국내 중소 PC 업체들의 주요 타깃은 공공 시장이다. 정부 기관에서 대량으로 발주하는 PC 수요에 이들 연간 매출이 좌우된다.
그러나 공공 시장에서 주로 쓰이는 8세대 i5 제품의 공급 부족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도저히 물량을 구하지 못해서 입찰을 포기한 회사의 제품을 가져와 겨우 물량을 맞추는 사례도 빈번하다.
물론 대안으로 AMD CPU도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국내 PC용 CPU 시장에서 인텔이 90% 이상 점유율로 압도하고 있다. 보수적인 구매 방식을 선호하는 정부 기관과 부족한 CPU 물량 사이에 낀 PC 제조사들은 울상이다.
국내 한 PC 업체 대표는 “올해 3분기부터 인텔 CPU 공급 물량이 줄어들면서 공공기관 납품에 차질을 빚고 있다. 납기 지연으로 입장이 곤란해졌다”면서 “물량이 부족해 웃돈을 주고 비공식 유통경로(그레이마켓) 제품을 써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공급이 부족해 그레이마켓에서조차 물건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인텔 측은 수요 초과를 물량 부족 원인으로 설명했다. 데이터센터 CPU 수요 급증과 예상치 못한 PC 수요 증가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인텔의 칩 디자인 결함, 공정에 활용되는 소재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PC 업체들은 대안으로 AMD 제품 활용을 늘리고 있다. 국내 공공 PC 시장은 AMD 제품으로 새로운 제품군을 꾸리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제품군 다각화가 가장 주요한 이유지만 인텔 CPU 공급 개선을 손 놓고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게 업계 목소리다.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 이영호기자 youngtige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