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법안이 개시됐다. 이제 성희롱 못지 않게 '힘희롱'도 조심해야 한다. 법보다 주먹이라는 말이 있듯 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겠지만 생각없이 행동하는 상사에게 경종을 울리는 기회는 될 것이다. 몸에 좋은 약도 어지럽고 눈앞이 캄캄한 명연 현상이 나타나듯이 법 시행 초기에는 부작용을 각오해야 한다. 이미 공공연하게 조롱 섞인 비판이 일고 있다. 그동안 성희롱으로 몰릴까 무서워서 농담도 못했는데 이제는 힘희롱으로 몰릴까 겁나서 눈 마주치기도 겁난다는 한탄이 있다. 명확하게 어떤 행위가 직장 내 괴롭힘인지 입장에 따라 논란의 여지가 많아서 오히려 불란만 조장한다는 염려도 있다. 상식선 상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법정 다툼까지 불사하게 만드는 것은 직장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기만 할 것이라는 우려의 소리도 있다. 또 막상 신고했을 때 제대로 처벌될리도 없다는 냉소 시각도 있다. 종이호랑이가 솜방망이 들고 큰소리치는 격이라고 법의 모호함을 지적한다. 당분간은 이 같은 다양한 관점과 의견 속에서 제도가 정착되고 인식이 개선될 것이다.
그동안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 '갈등이 두려워 피한다' '참거나 모르는 척 한다' '혼자 속으로만 참는다' '이직이나 퇴사를 준비한다' 등 주로 당사자만 피해를 보고 대응도 소극적으로 임했다. 이 때문에 직장 내 괴롭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오히려 문제 유발자 취급을 받았다. 지켜보는 동료들도 화장실에서 나누는 뒷얘기에 불과했고, 휴게실에서 소곤대는 스캔들 정도로 흐지부지됐다. 이런 무심함과 소극성이 직장 갑질을 살찌웠다. 상식선에서 해결한다는 미명 아래 기득권자에게 유리한 방법으로 유야무야됐다. 이런 불합리함이 독버섯처럼 자라는 이유는 문제 의식을 멈췄기 때문이다. 약속을 어기는 것을 묵인하면 그 약속만 어겨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약속을 어겨도 된다는 것을 합의하는 것과 같게 된다. 매너 없는 행동을 허용하면 이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앞으로도 매너 없는 행동을 해도 된다는 것을 '훈련'하는 것이다. 악은 파괴하지 않는 순간 구축되기 시작한다. 이제 “나만 아니면 돼” 하는 구경꾼이 되지 말고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는 수호자가 돼야 한다. 한 걸음만 물러나서 보면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고, 내 동생과 내 자녀에게도 일어날 법한 일이다. '보는 사람 입장에 따라 다르지' '남 일에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지'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싸움은 구경은 할지언정 말려들면 안돼'라며 강 건너 불구경하 듯 구경할 일이 아니다. 좀 더 성숙한 직장 문화를 만들려면 나부터 민감해져야 한다. 이제 시행법이 마련된 만큼 피해 당사자만이 아니라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이 매서워져야 한다. 이 법안이 악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용되고 있지는 않은지, 제대로 적용하고 있는지 똑바로 쳐다봐야 한다. 부정을 단속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법 자체가 아니라 그 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눈이다.
피해 당사자도 감정에 치우치고 상처에 매몰되면 안 된다. 이제 혼자 상처받고 도망갈 필요가 없다. 안전망이 마련됐고 사회 약속이 생겼다. 평정심을 발휘해서 사실을 하나하나 밝혀 내야 한다. 상대의 행동에 상처받아 허우적거리면 밝혀 낼 겨를을 놓친다. 부러우면 지는 게 아니라 흥분하면 지는 거다. 내가 멀쩡해야 벌떡 일어나서 다음 행동을 취할 수 있다. 나는 이 따위 괴롭힘에 영향받지 않지만 이 일이 다른 사람에게 재발되지 않기 위해서 드러내야 한다. 내가 억울하고 힘들어서가 아니라 앞으로 이런 일이 안 생기게 하기 위해서 행동해야 한다.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할 때 “우울해” “힘들어” “무섭고 억울해”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회사 다니기 싫다” “도망가고 싶다, 피해 버리고 싶다”라며 자기 안에 꽂혀 있으면 안 된다. 나에게 꽂히면 내가 최고 피해자고 내가 제일 억울하다. 이런 상태로는 누군가가 구해 주기를 기다리는 한이 있더라도 스스로 진실을 드러내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 본인 안으로 시야를 좁히면 고통스럽고 암담할 따름이다. 나의 고통이 헛된 것이 되지 않게 하려면 이번 사건을 반면교사 삼아 우리 직장에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고된 일보다 헛된 일이 더 고통스럽다. 이번에는 내가 어찌하다 이 일을 당해서 힘들고 아팠지만 이 아픔이 헛된 것이 되지 않으려면 재발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러면 나로부터 나와서 전체 시각을 가져야 한다. 작전을 짜려면 꼭대기에서 조감하는 시야가 필요하다. “저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문제 행동이란 걸 알고 저러는 걸까, 모르고 저러는 걸까?” “내 입장에서만 이렇게 느끼나? 제3자 시각에서는 어떻게 볼까?” “오늘만 특별히 페이스를 잃은 걸까? 앞으로도 계속 저럴까?” “나에게만 이러는 걸까? 다른 사람에게도 비슷한 경험을 주는가?” “누가 나와 같은 피해를 봤을까? 앞으로 누구에게 이런 피해를 또 줄까?“라는 질문을 해봐야 한다. 감정에 치우쳐서 비련의 피해자로 숨지 말고 사실을 기반으로 수사하는 형사가 돼야 한다. 이런 반문과 확인 절차를 거치면 다른 피해도 찾고, 증거도 차근차근 모을 수 있다. 한두 번 일어난 해프닝으로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직장인 괴롭힘법은 들어보셨죠? 변호사 선임비 두둑하신가봐요? 수갑을 차봐야 정신을 차리시겠어요? 지금 녹음하고 있으니까 말 잘 하세요”라며 흥분하면 안 된다. 가래로 치워야 할 일을 호미 들고 덤비는 것이다. 섣부른 행동은 용기가 아니라 객기다. 무턱대고 싸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을 제기하고 어떻게 제재할 것인지 차분히 앉아서 곰곰히 생각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나의 상처는 사라지고 전체를 위한 사랑이 돋아난다. 격분하지 말고 공분하자!
지윤정 윌토피아 대표이사 toptmr@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