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이 만난 생각의 리더]<112> '두레박의 갈증'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하)

Photo Image
이어령 전 장관은 “이제는 생명이 자본인 생명 자본 시대”라면서 “생명체만이 정보를 필요로 하고, 증식을 한다. 정보는 곧 생명이다. 생명이 있는 자만이 정보가 필요하다”며 '생명력'을 강조했다. 박지호기자 jihopress@etnews.com

1988년 9월 17일. 세계인의 시선이 제24회 서울올림픽 개막식이 열린 대한민국 서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 쏠렸다. 개막식 시작 2시간여 후 갑자기 운동장에 정적이 흘렀다. 어디선가 “삐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운동장 한 모서리에서 흰 모자에 흰 티셔츠와 흰 반바지를 입은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며 나타났다. 소년은 운동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더니 굴렁쇠를 어깨에 메고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세계인의 가슴에 감동을 안긴 '굴렁쇠 소년'이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아이디어다. 그는 올림픽 개·폐막식 총괄 기획을 맡아 한국 이미지를 쇄신하고 공백의 감동을 지구촌에 선물했다.

-굴렁쇠 소년은 어떤 의미인가.

▲텅 빈 운동장에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흰 옷을 입은 꼬마가 굴렁쇠를 굴리며 지나가는 것은 움직이는 공백이다. '전쟁고아' '분단국'이라는 한국 이미지를 쇄신하고 생명을 육성하며, 서양과 다른 공백의 미를 제시하고자 했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운동장에 그려 보려고 했는데 대성공이었다. 굴렁쇠 소년은 올림픽 종주국인 그리스 아테네올림픽에서도 아이디어를 응용했고, 두고두고 회자됐다. 그 소년은 1981년 9월 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세울(SEOUL)”이라고 올림픽 개최지를 발표하는 날 태어난 아이다.

Photo Image

-88 서울올림픽에서 막판에 최종 성화 주자를 교체했다.

▲당초 서울올림픽 최종 성화 주자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옹이었다. 대회 2~3일 전에 그런 내용이 언론에 흘러나갔다. 역대 올림픽에서 마지막 성화 봉송 주자의 이름이 새나간 일은 없었다. 내가 박세직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에게 “국가 기밀이 알려졌다. 말이 안 된다. 최종 주자를 바꾸자”고 해서 재선발했다. 그 주자가 바로 “라면 먹고 뛰었다”는 임춘애 선수다. 최종 주자는 나와 당시 박세직 위원장 등 세 사람만 알기로 약속했다. 서운해 하는 손기정 옹을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보안을 지키기 위해 보도 자료를 내가 집에서 워드프로세스로 직접 만들었다. 보도 자료는 발표 당일 새벽에 인쇄, 언론에 배포했다. 그때 모든 기술은 양날의 칼이라는 사실을 새삼 알았다. 인터넷에도 명암이 있다. 독사가 물을 마시면 독이 되지만 암소가 마시면 우유가 된다. 정보를 정치로 악용해서 상대를 감시하면 '빅브라더'가 된다.

-인터넷으로 인해 마음고생을 한 적이 있는가.

▲10여년 전 중앙일보 신년호에 소원 시 '날개'를 썼다. 한국 국민에게 다시 비상할 수 있는 날개를 달라는 기도문 형식의 시다. 그 시를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필요에 따라 개작해서 인터넷에 계속 올리고 있다. 인터넷이 생사람 잡는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나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일명 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대규모 집회 때면 시 일부를 멋대로 변경해서 부제까지 달아 카카오톡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다. 좋은 글이건 나쁜 글이건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건 옳지 않다. 남의 시에 내 이름을 붙이는 황당한 일도 있다. 인터넷 시대를 갈망하면서 정보화는 앞서 가자고 한 나다. 만나는 사람마다 “시 잘 읽었습니다”라고 하면 “시를 쓴 적이 없다”고 해명하기에 바쁘다. 정보기술(IT) 강국답게 인터넷 문화도 선진국이 돼야 한다. 남의 시를 개작해서 퍼 나르기를 하는 일은 이제 근절해야 한다.

Photo Image

-우리는 인공지능(AI) 시대 준비를 잘하고 있다고 보는가.

▲AI는 미국이 단연 1위다. 한국은 IT 강국이지만 AI 분야는 중국과 일본에 한참 뒤처졌다. 일본 신문을 보면 날마다 AI 강연이고, 빅데이터 기사가 넘친다. 중국은 딥러닝 연구 대가인 앤드루 응을 중국 바이두 책임자로 발탁, AI를 연구했다. AI를 좋은 방향으로 사용할 나라는 한국이다. 국가 위기 사태를 맞으면 외국의 경우 가게를 털고 난리가 난다. 우리는 4·19혁명을 비롯해 무정부에 가까울 때에도 약탈은 없었다. 대단한 민족이다. AI 강국으로 우뚝 서야 한다.

-알파고 대국을 어떻게 봤는가.

▲알파고가 왜 한국에 와서 이세돌과 대국했을까. 한국이 IT 강국, 인터넷 강국이기 때문이다. 바둑 종주국은 중국이다. 바둑을 중국이 만들고 한국이 일본에 전수했다. 일본은 바둑을 상업화했다. 만약 중국에서 대국했다면 현지 중계를 못했을 거다. 알파고의 '알파'는 영어 A에 해당한다. '고'는 한자 '기(碁)'의 일본식 발음이다. 중국식으로 하면 알파판, 한국식은 알파바둑이다. AI는 딥러닝이다. 쉽게 말해서 쥐를 미로에 집어넣으면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 출구를 찾는다. 기계가 경험을 축적해서 출구를 찾는 게 기계학습이다. 그런데 어떻게 됐는가. 이세돌이 4번 대국해서 누구도 못 둔 78수를 둬 1승을 거뒀다. 알파고가 학습한 것이 없어진 것이다. 알파고 대국은 호모사피엔스 이래 기능이 인간과 대등하거나 월등한 놈이 나왔다는 걸 서울에서 선포한 것이다. (이 교수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스마트폰을 들더니 음성 인식 기술인 '시리'에 말을 건넸다.) “시리, 너 생일이 언제야?” 그러자 시리가 생일을 말했다. 이제 인간이 아닌 게 인간처럼 생각하는 세상이 왔다.

-(사람들이) AI 시대를 불안해 한다.

▲인간 두뇌, 즉 지능은 뭔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우리보다 지능이 월등히 높다. 그러나 알파고가 나보다 글을 잘 쓸 수 있는가. AI가 효도를 하고, 사랑을 알겠는가. AI가 아침 햇살의 따사로움을 알겠는가. 지금은 병에 걸려야 병원에 간다. 그러나 AI 시대 의학은 치료에서 예방-선제의학-정밀치료 시스템으로 바뀐다. 우리는 젓가락 문화다. 스마트 젓가락이 되면 내가 먹는 음식을 빅데이터로 분석, 사전에 간이 나빠질지 당뇨가 발병할지를 알려준다. AI가 발달했다고 무서워할 게 없다. AI가 못하는 심성이나 덕성, 아름다움, 봉사를 사람이 하면 된다.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무지하다'는 걸 가르쳤다. 이제 가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Photo Image

-생명 자본이란.

▲생명 자본이란 생명력이다. 김용 세계은행(WB) 총재가 언젠가 TV에 나와 이야기한 걸 시청했다. 그는 “지구 최빈국의 피란민 등에 업혀 피란을 나온 내가 이제는 아프리카 등지에서 봉사 활동을 한다. 아프리카 어린이 가운데 WB 총재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라고 말했다. 나는 10여년 전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융합한 디지로그 시대를 예언했다. 어린이가 태어난 것은 생명 가치다. 효(孝) 이야기를 하면 케케묵은 이야기라고 하는데 효가 유교 덕목인가. 예를 들어 100만달러짜리 목걸이를 선물했다면 고맙다고 생각할 것이다. 밤중에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목걸이를 안 주면 죽인다고 하면 어떻게 할까. 목걸이를 주고 말 거다. 그 목숨을 누가 줬는가. 부모님이고, 종교로는 신이다. 생명 존중을 알면 부모에게 불효를 하겠는가. 자연에 효를 행하면 자연 파괴를 하겠는가. 생명 존엄을 모르기 때문에 자연을 파괴하고 불효를 한다. 아이들이 “엄마 나 낳아 달라고 했어”라고 하는데 생명이 귀한 줄 알면 그런 소리를 못한다. 10원 넣어서 10원이 나오면 자본이 아니다. 10원 넣어서 100원이 나와야 자본이다. 금덩이를 은행에 넣으면 이자가 나온다. 이자로 움직이는 사회는 무생물 사회다. 캐피털이란 게 짐승 머릿수를 말한다. 봄에 씨를 뿌려서 가을에 수확하면 몇 배가 나온다. 돈은 기호와 종이다. 이제는 생명이 자본인 시대다. 생명체만이 정보를 필요로 하고, 증식을 한다. 무생물인 돌은 정보가 필요 없다. 살아 있는 것은 정보 없이는 못 산다. 정보는 곧 생명이다. 생명이 있는 자만이 정보가 필요하다.

Photo Image

-최근 한·중·일 3국 간 갈등이 심하다.

▲우리가 잘못하면 구한말처럼 된다. 10년 전에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를 만들었다. 석학 30여명이 모였지만 역부족이었다. 가위는 보를 이기고 보는 바위를 이긴다. 내가 말한 가위바위보 문명론이다. 패권 다툼 속에서 공존의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한·중·일 가운데 한 나라가 싹쓸이하면 되겠는가. 나는 '지의 최전선'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를 말했다. 중국은 우크라이나가 건조하다가 중단한 항공모함을 고철이라며 구입해서 항공모함으로 개조했다. 중국 최초의 항공모함 랴오닝호다. 도광양회의 대표 격이다. 나뭇잎 하나 지는 걸 보고 가을이 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게 미래로 가는 지도 읽기다. 한국은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맞부딪치는 곳이다. 여기서 뭔가 풀리지 않으면 양대 세력이 충돌하는 최전선이 된다.

Photo Image

-좌우명과 취미는.

▲좌우명은 '두레박의 영원한 갈증'이다. 물동이는 물을 채우면 그걸로 만족한다. 두레박은 물이 차 있으면 안 된다. 두레박은 항상 비어 있어야 한다. 비어 있는 두레박은 늘 목이 마르다. 그게 지적 호기심이고 갈망이다. 두레박의 영원한 갈증, 그게 내 삶이다. 취미는 무취미다. 나는 평생 놀고먹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누가 시켜서 일을 한 적이 없다. 다 좋아서 했다. 장관도 안 한다고 고사하다가 초대 문화부 장관이라고 해서 했다. 각종 이벤트를 많이 했다. 먹고 놀면 안 된다. 놀면서 먹어야 한다.(웃음) 예술가들은 놀면서 일을 한다. 교수는 학생 가르치는 일이 재미있어야 한다. 내가 임플란트를 해야 하는데 도망만 다녔다. 어느 날 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환자 이빨만 보면 가슴이 설렌다”고 했다. 그 말 듣고 그 의사한테 임플란트를 했다. 공자 말씀인데 즐겁게 하는 일이 최고다. 내가 돈벌이 하자고 책을 쓰고, 올림픽을 하고, 교수를 했으면 다 실패했을 것이다. 인터넷 시대 지지자(知之者)는 AI다. 그 위가 호지자(好之者)고, 또 그 위가 낙지자(樂之者)다. 바로 지호락(知好樂)이다. 즉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거워하는 것만 못한 법이다. 연애가 노동이라면 비 맞아 가며 연인을 기다리겠는가. 골프가 노동이라면 18홀을 돌 마음이 들겠는가. 임도 보고 뽕도 따는 게 최고다.

인터뷰가 2시간을 훌쩍 넘기자 연구소 직원이 다음 일정을 알려왔다. 서둘러 인터뷰를 끝냈다. 이 전 장관은 내년 초 출간을 목표로 AI 책을 집필하고 있다.


이현덕 대기자hdlee@etnews.com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