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 특정기업 종속 모델 벗어나려면… 혁신 선도형 업체로 거듭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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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ASML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개발했다. EUV 노광 장비는 10나노 이하의 차세대 반도체 제조 공정을 수행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시스템으로 평가받는다. 노광은 웨이퍼 위로 회로 패턴을 새기는 공정이다.

100나노급 공정 시대에는 일본 니콘이나 캐논도 노광 장비 시장에서 낮지 않은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EUV 장비를 공급할 수 있는 업체는 ASML밖에 없다. 일본 업체는 포기했지만 ASML은 연구개발(R&D)에 매진했다.

2012년 ASML은 R&D 투자를 위해 삼성전자, 인텔, TSMC에 20%가 넘는 자기 지분을 쪼개 넘겨주는 특단의 조치를 단행했다. EUV 장비 개발에 들어가는 천문학 규모의 투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극약 처방이었다. 수년간의 R&D 끝에 결국 EUV 장비는 양산 라인에 도입될 수 있을 정도로 성능이 개선됐다. 2012년 삼성 등에 R&D 투자액을 제공받던 당시 80~90달러를 맴돌던 주가는 현재 120달러선을 웃돌며 연일 최고가 행진을 하고 있다.

ASML은 반도체 소자 업체와의 계약 관계에서 `을`이지만 사실상 `갑 같은 을`의 위치에 서 있는 협력사다. 공급 업체가 하나밖에 없고, 전체 공정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생산 능력은 한정돼 있는데 너도나도 장비를 먼저 구매해 가겠다며 물밑 싸움이 치열하다. EUV 장비 가격은 대당 무려 2500억원에 이른다. 어지간한 국내 장비 업체의 1년치 매출이다. 그럼에도 없어서 못 파는 것이 지금의 사정이다. ASML의 일선 영업 담당자는 여전히 `을`이지만 전체로 보면 이런 협력사를 얕잡아 볼 고객사가 있을 리 만무하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관계가 아닌 실력 하나만으로 가격을 협상할 수 있는 환경은 제품 경쟁력에서 나온다. 결국 R&D란 얘기다.

ASML뿐만 아니라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AMAT), 램리서치, 도쿄일렉트론(TEL), KLA-덴코 역시 비슷한 지위에 있다. 검사 계측 분야 1위 업체인 KLA-덴코의 경우 `말 안 듣는` 협력사로 유명하다. 고객사가 신규 장비 개발 의뢰를 하면 개발비부터 먼저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럼에도 이 회사 장비를 사용할 수밖에 없게 돼 있다. 대체 장비가 없기 때문이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 장비 분야에선 유기 재료 증착 장비 업체인 일본 도키가 갑의 위치에 속한 장비 업체로 꼽힌다.

국내 장비 업체 가운데 연간 매출액이 1조원을 넘었거나 1조원을 목표로 설정한 기업이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진정한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려면 R&D 투자 비중을 더 높여야 한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 전자신문이 자체 조사한 결과 ASML 같은 글로벌 장비 업체 톱5는 연간 매출액에서 평균 15%를 R&D에 재투자한다. 그러나 지난해 매출액 기준 톱5 국내 장비 기업의 R&D 투자 비중은 2.9%에 그쳤다. 한두 곳의 고객사에 목을 매는 종속형 사업 구조가 고착화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국내 장비 업계의 R&D 투자 비중이 낮은 가장 큰 이유는 위험 부담을 떠안길 두려워하는 풍토 때문이다. 미래에 필요한 장비를 선행 개발한 뒤 이를 고객사에 제안하면 높을 가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실패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선행 개발 작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분석이다.

장비 업계 전문가는 2일 “특정 대기업의 지원을 받아 공동 개발을 하면 다른 고객사에는 당연히 해당 장비를 팔 수가 없다”면서 “초기에는 이런 모델로 성장하는 것이 용이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가면 언제든 내쳐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회사 규모가 어느 정도 커지면 일정 부분의 위험 부담을 안더라도 최후의 일격을 가해야 한다는 의미다.

1조원 매출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연간 매출을 이 정도 낸다면 양질의 R&D 인력을 수혈할 수 있다. 필요한 경우 인수합병(M&A)으로 모자란 기술을 가져오는 것도 가능하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 장비 산업계가 국산화에 매달려 성장해 왔다면 연매출 1조원 기업이 속속 출현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R&D를 통한 마지막 한 수를 띄워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했다.

정부 차원에서도 장비 기업의 R&D 투자를 독려할 다양한 정책 수립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지난 몇 년 동안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공정 장비 분야의 정부 R&D 과제가 줄어서 최근 투자가 더 축소된 경향이 있다”면서 “장비 분야는 4차 산업혁명의 씨앗 산업인 만큼 정부도 관심을 기울여서 인센티브 정책 개발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