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반도체 50년]<끝> 2000년 전후로 꽃핀 한국 팹리스 반도체 산업계

세계 반도체 시장의 연간 매출액 규모는 약 3000억달러다. 이 가운데 메모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30%밖에 안 된다. 나머지가 모두 비메모리 반도체다. 한국은 삼성전자와 현대전자의 활약에 힘입어 메모리 반도체 최강국이 됐다. 그러나 메모리를 제외한 나머지 반도체 분야에선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비메모리`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도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만 유독 강했기 때문이다.

우남성 전 삼성전자 시스템LSI사업부장(사장)은 공석에서든 사석에서든 단어부터 고쳐 쓰자며 입버릇처럼 말했다. 우 전 사장은 “메모리보다 시스템반도체 시장이 몇 배는 더 크다”면서 “비메모리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메모리에 함몰되고, 그 결과 시스템반도체 분야를 육성해야 할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강변했다.

시스템반도체는 생산공장이 없는 팹리스(Fabless) 업계가 좌지우지한다. 이들은 칩 설계만 하고 실제 생산은 위탁 생산 전문 파운드리 업체에 맡긴다. 퀄컴, 엔비디아, 미디어텍 같은 세계 반도체 업체 모두 공장이 없는 팹리스 반도체 업체로 분류된다. 미국의 인텔과 텍사스인스트루먼츠(TI), 독일의 인피니언, 일본의 르네사스나 롬 같은 업체는 생산공장을 갖추고 있는 종합반도체(IDM) 업체다. 그러나 경영 효율 면에서 팹리스가 유리하다. 공장을 운용하려면 그만큼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IDM도 최근 생산공장 확대 대신 파운드리 물량을 늘리는 `팹라이트`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반도체 설계 전문 업체는 1987년에 출범한 아남반도체설계다. 아남은 반도체 설계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그룹에서 인력 4명을 선발했다. 이들은 미국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VLSI테크놀러지 디자인센터에서 반도체 설계 교육을 받고 돌아와 아남반도체설계에서 활약했다. 당시 황무지나 다름없던 한국 시스템반도체 설계 시장에서 아남반도체설계는 많은 기술 인력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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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 홍보 전시회에 참석한 서두로직. 서두로직을 필두로 한국에도 팹리스 업체가 속속 생겨나기 시작했다(자료 한국반도체산업협회)

토종 팹리스 업체은 1990년대에 본격 출현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출신 유영욱 대표가 1990년에 세운 서두로직이 한국 팹리스의 효시다. 이 회사는 통신 모뎀칩, 오디오용 코덱칩 등을 설계했다. 서두로직은 2004년 셀로코에 매각됐다.

1993년에는 씨앤에스테크놀로지(현 아이에이), 1996년에는 아이앤씨테크놀로지가 출범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현대전자와 LG반도체의 빅딜 이후 대기업에서 쏟아져 나온 전문 인력은 너도나도 팹리스 반도체 업체를 창업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새로 생겨나는 팹리스 반도체 업체만 연평균 15~20개에 달했다. 1998년 1월 팹리스 13개사가 모여 ASIC설계회사협회를 창립했다. 이 협회는 약 5년 뒤인 2003년 10월 팹리스 100여개사가 참여하는 IT-SoC협회로 확대 개편됐다. 당시 팹리스 반도체 분야의 창업 붐이 어느 정도로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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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민 엠텍비젼 사장(전자신문DB)

국내 팹리스 업계의 성장을 이끈 수요처는 휴대폰이었다. 휴대폰의 고성능화, 다기능화로 관련 분야에서 성장세를 구가하던 팹리스 기업이 많았다. 카메라 컨트롤러, 메모리, 디스플레이 등에 사용되는 반도체 수요가 폭증했다. 이미지센서 프로세서와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를 개발해 삼성전자, LG전자에 공급한 코아로직 및 엠텍비젼은 이 시기에 한국 팹리스의 대표 주자로 꼽힌다. 다윈텍(현 한컴지엠디), 피델릭스, 텔레칩스, 티엘아이, 이엠엘에스아이(현 제주반도체)도 잘나가던 팹리스 업체다.

IMF 외환위기가 어느 정도 종료된 이후에도 이들은 크게 성장해 나갔다. 2000년 들어 씨앤에스테크놀로지, 코아크로스, 에이디칩스 등 3개사는 코스닥에 상장했다. 엠텍비젼, 코아로직, 텔레칩스 등 휴대폰과 MP3 플레이어용 멀티미디어 SoC 전문 설계업체는 코스닥 상장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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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보브반도체의 MCU 제품군

2006년 이후로도 디스플레이용 반도체 설계 전문업체 티엘아이, 엘디티, 실리콘웍스, 아나패스가 코스닥에 상장, 한국 팹리스 매출 순위 상위권을 차지했다. 현대전자에서 분사해 독립한 매그나칩반도체, 매그나칩에서 마이크로컨트롤러(MCU) 사업이 분사돼 설립된 어보브반도체도 국내 팹리스 산업계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업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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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자동차용 반도체 공동개발협약식. 왼쪽부터 이기섭 자동차부품연구원장, 이충곤 에스엘 회장, 이현순 현대자동차 부회장,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 권오현 삼성전자 사장, 서승모 씨앤에스테크놀로지 대표. 삼성과 현대차간 협력으로 화제를 모은 이 협력 관계는 결국 깨지고 말았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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