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이 만난 생각의 리더]<76>조세혁명 주장하는 한국컴퓨터 대부 성기수 박사

Photo Image
성기수 박사는 “한국이 제2의 도약을 위해 `조세(租稅)혁명`을 해야 한다”면서 “누구든지 늘 정직하고 성실하게,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면 못 이룰 게 없다”고 강조했다.박지호기자 jihopress@etnews.com

성기수 박사(전 동명대 총장)는 한국 컴퓨터 산업의 산증인이자 대부(代父)로 불린다.

성 박사의 이력은 경이롭다. 집안이 가난해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공대에 합격했다. 1961년 미국 유학을 떠나 세계의 명문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2년 1개월 만에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는 등 미증유(未曾有)의 기록을 세웠다. 하버드대 300년 역사에서 최단 기록이다. 기록은 아직도 신화로 남아 있다.

성 박사는 컴퓨터라는 용어조차 생소하던 시절인 1967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KIST) 초대 전산실장으로 있으면서 한국 행정 전산화를 선도했다. 이는 전자정부 구현의 시발점이 됐다. 그는 한국에 팀제를 가장 먼저 도입했으며, 상고나 공고 교과 과정에 컴퓨터 프로그램을 포함시킨 주역이다. 경제기획원의 예산 업무 전산화를 시작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88서울올림픽 운영·관리 전산화와 금융실명제 전산화를 완벽하게 끝냈다.

성 박사는 20년 전부터 “한국이 제2 도약을 하려면 `조세(租稅)혁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누구나 정직하고 성실하게, 용기를 내서 도전하면 못 이룰 게 없다”고 말했다.

-근황이 궁금하다.

▲거의 집에서 소일한다. 아내와 하루에 1만2000보를 걷는다. 아침, 낮, 저녁에 산책로를 걷는다. 요즘은 외부에 나갈 일이 거의 없다.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최단기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2년 1개월 만에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처음 하버드대 대학원에 유학 가서 영어를 못해 애를 먹었다.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는데 크루컷(crew cut)이라고 했지만 무슨 말인지 몰라서 고개를 끄덕였더니 스님처럼 머리를 빡빡 밀었다. 6개월이 지나자 말문이 터졌다. 좌절하지 않고 성실하게 도전했더니 하버드대 300년 역사에서 최단기 기록을 세웠다. 도전은 밑져야 본전이다.

-조세혁명을 주장했다. 이유가 궁금하다.

▲한국은 산업화에서 뒤졌지만 정보화에서 남보다 앞서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을 이룩했다. 한국이 다시 한 번 기적을 이루려면 조세혁명을 해야 한다고 20여년 전부터 주장했다. 한국을 세계 금융 허브로 만들면 취업난도 해결할 수 있다. 국세청 업무 전산화를 할 때부터 주장했다. 조세는 직접세와 간접세로 구분하는데 직접세를 없애고 간접세로 통일시키면 무과세 층이 없어진다.

룩셈부르크에는 이자세가 없다. 외국 금융기관이 다 몰린다.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 1위다. 내국인과 외국인 취업 비율이 반반이다. 우리가 부가세를 없애면 한국은 관광천국, 쇼핑천국이 될 것이다. 법인세를 인상하면 기업은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한다. 그러면 일자리가 준다. 아일랜드의 법인세는 12.5%다. 대기업들이 서로 그곳으로 옮겨 갔다. 대한항공 콜센터도 아일랜드에 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조차 “법인세를 줄일 수 있다면 남극이라도 가겠다”고 말했다. 한국이 조세혁명을 하면 국민소득이 올라가고 일자리도 는다.

Photo Image

-한국에서 최초로 팀제를 도입했다.

▲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소 공채 직원도 2년 계약직이었다. 프로젝트가 많았다. 그래서 팀제를 도입했다. 나는 팀장에게 직원 선발(채용)권과 예산 집행권을 다 줬다. 업무에 절대 관여하지 않았다. 심지어 팀장이 평일에 팀원을 데리고 놀러 가도 놔뒀다.

-윗사람들과는 다툼이 많았나.

▲불합리한 지시나 청탁은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인사에 개입하려는 곳이 많았다. 나는 부당한 지시는 무시했다. 대통령 아들을 명문고에 배정하라는 청와대의 압력도 뿌리쳤다. 부당한 지시를 한 번 들어 주면 계속 관여할 게 아닌가.

-어떤 일이 있었나.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전산실장 시절에 컴퓨터를 도입하는데 기종을 놓고 청와대 인사와 입장이 엇갈렸다. 청와대 인사는 특정 업체 기종을 무조건 도입하라는 것이어서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맞섰다. 그랬더니 도입 예산을 전액 삭감하겠다고 해서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내 주장대로 컴퓨터를 도입했는데 정말 예산을 다 깎았다. 당시 기혼 여성은 뽑지 않았다. 나는 기혼 여성을 전산실 프로그래머로 뽑았다. 알고 보니 그 남편이 운동권이었고, 해고하라는 등 말이 있었지만 이를 거부했다. 나중에 그 여직원은 국내 대기업으로 스카우트됐고, 최초 여성 임원으로 승진했다.

88서울올림픽이 끝나자 과학기술처에서 시스템공학연구소(SERI)에 직원 300명을 일시 해고하라고 했다. 나는 시간을 두고 직원을 다른 곳으로 보내겠다며 거절했다. 시차를 두고 증권회사, 외국 기업, 국내 대기업 등에 전산 인력을 보냈다. 그들은 SERI보다 2~3배 더 많은 월급을 받고 자리를 옮겼다. 매주 수요일 오후에는 자체 체육행사를 했다. 이날은 무조건 산행을 하든지 운동을 하도록 했다. 다른 부서는 일하는데 우리만 테니스를 치거나 등산을 했다. 이런 상황을 상급 기관이나 윗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고위 공직에 뜻은 없었나.

▲그런 생각이 있었으면 소신대로 일을 못했다. 금융실명제 전산화와 관련해 사표를 낸 적이 있다. 그때 한국외국어대 황병태 총장(주중 대사 역임)이 초대 대학원장으로 오라고 해서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런데 사표가 반려됐다. 고민하다 그대로 있기로 했다. 그로 인해 황 총장 입장이 난처해졌다. 한번은 노태우 정부 시절에 청와대에서 보자고 해서 갔더니 “대통령이 과기처 장관으로 내정한 상태라며 각별히 언행에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발표를 보니 다른 사람이 임명됐다. 청와대 수석이 반대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조부님이 지어 준 내 호가 의구(義矩)다. `정의로운 네모난 돌`이란 뜻인데 네모난 돌이니 잘 굴러 갈 수 있겠는가.

Photo Image

-서울올림픽 전산화는 어떻게 개발했는가.

▲당시 정부는 경기 운영·관리와 경기 결과 처리 시스템을 외국 업체에 맡길 생각이었다.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미국에 용역을 주라고 압력을 넣었다. 이런 소식을 듣고 노태우 당시 올림픽조직위원장(대통령 역임)을 두 번이나 찾아가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노 위원장이 “우리는 그런 경험이 없지 않느냐”고 해서 “나도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우리 인력이 외국보다 못한 게 없다. 우리가 이 일을 해야 한국 소프트웨어(SW) 산업이 발전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우리가 시스템 개발을 담당했다.

-금융실명제 전산화 과정에서 곡절이 많았다고 들었다.

▲전두환 정부 출범 후 강경식 재무부 장관이 1982년 7월 3일 “내년 1월부터 금융실명제를 전면 실시한다”는 이른바 7·3조치를 발표했다. 발표 전날 밤 강 장관이 전화로 `금융실명제 도입에 기술상의 문제가 없는지`를 물었다. “문제없다”고 대답했다. 정치권과 기득권층은 `준비가 미흡하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강 장관의 부탁으로 재무부 기자실에서 “금융실명제 도입에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당시 과기처 장관은 `준비가 미흡하다`고 했다. 그해 7월 14일 국회에 불려 나갔다. 야당 의원이 가능 여부를 `예, 아니요`로 대답하라고 하기에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그걸 언론이 크게 보도하자 난리가 났다. 이튿날 청와대에서 불러 갔더니 전 대통령, 강 장관, 김재익 경제수석(작고) 3명이 앉아 있었다. 전 대통령이 “모두 안 된다고 하는데 왜 성 소장만 된다고 하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인력이나 기술에 문제가 없는 이유를 소상히 설명했다. 전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실명제를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금융실명제는 이듬해 1월부터 시행하지 못했다. 여야가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대통령이 정하는 날 시행한다`는 단서를 달고 시행일을 계속 미뤘다. 그 후 1993년 8월 12일 김영삼 정부에서 전격 실시했다. 그러나 혼란은 전혀 없었다.

-상고와 공고에서 컴퓨터 교육을 실시하도록 했다.

▲1969년 11월 말 MBC TV에서 매주 수요일 늦은 밤 시간대에 방영한 `명교수, 명강의`라는 프로그램에 나가 `미래 사회는 컴퓨터 시대`라는 취지로 강의를 했다. 이를 본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이튿날 청와대 전 직원 대상의 특강을 했다. 이후 `스타강사`가 됐다. 이듬해인 1970년 4월 6일 박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동향 보고 회의에서 30분 동안 `예산 업무 전산화와 정부 행정 전산화`를 보고했다. 그날 “정부 업무 효율과 생산성 향상을 위해 정부가 행정 전산화를 해야 한다. 상업고에는 주산 대신 코볼 등 컴퓨터 프로그램, 공업고에는 컴퓨터 수치제어와 포트란을 교육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장관이 난색을 보였지만 박 대통령 지시로 이듬해부터 고교 교과서를 이런 방향으로 개정했다. 박 대통령은 원칙을 세우면 집행하고, 매년 연두순시에서 이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박 대통령의 국정 리더십은 강력했다.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언제가 고향인 성주 초전초등학교에 가서 강연을 했다. 한 학생이 “어떻게 하면 박사가 될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용기를 내서 도전하면 다 이룰 수 있다”고 대답했다. 젊은이들은 어려움이 와도 절대 포기하지 말고 늘 용감하게 도전해야 한다.

1934년생인 성 박사는 미국 하버드대에서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 공군사관학교와 서울대에서 강의했다. KIST에서 28년 동안 재직하면서 전산실장과 부소장, 시스템공학연구소장, 과학기술정보센터 소장을 역임했다. 이어서 부산 동명대 총장과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으로 일했다. 취미는 바둑(1급). 1979년 5·16민족상 산업부문 상을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 다과회에서 성 박사를 옆으로 불러 “머리는 중학생처럼 생겼지만 우리나라에서 머리가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2000년 1월 과학자들이 선정한 대학민국 10대 과학자로 뽑혔다. 저서로는 `젊은이여 도전하라`와 `하버드 3백년의 신화, 성기수 박사` 등이 있다.


이현덕대기자hdlee@etnews.com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