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최고법원(ECJ)의 이번 판결은 사실상 유럽이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보다 ‘개인의 사생활 보호’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구글은 이번 판결이 결점을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크다고 반발했다. 미국의 경우 표현의 자유를 보다 중시하는 풍토다. 전문가들은 임시조치 제도를 시행 중인 국내에서도 ‘잊혀질 권리’에 대한 법·제도 정비가 시급하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유럽법원,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에 힘 실어줘
이번 판결은 유럽연합(EU) 28개국 5억명의 주민에게 적용된다. ECJ는 판결문에서 “부적절하거나 연관성이 떨어지거나 과도한 개인정보에 대해 정보 당사자가 구글을 상대로 삭제를 요구할 수 있다”고 밝혔다.
후폭풍도 벌써부터 감지된다.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반발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자신의 기록을 삭제할 수 있도록 한 권리가 오래된 아동 성범죄 기록 등 공공의 이익을 위하는 정보를 없애는 용도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미국은 수정헌법 제1조에 따라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고 있으며 세계 SNS 시장을 주도하는 만큼 잊혀질 권리를 인정할 경우 대규모 소송에 휘말일 가능성이 커진다.
페이스북, 구글 등이 주요 회원사로 있는 컴퓨터 및 커뮤니케이션산업협회는 성명을 내고 “엄청난 규모의 사적검열의 문이 열렸다”며 “정치인이나 무언가를 숨기려는 사람에 의해 악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파이낸셜타임스 역시 사설을 통해 “잊혀질 권리가 힘있는 자들의 ‘과거를 덮는 권리’가 돼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조너선 지트레인 하버드 로스쿨 교수는 판결에 대해 “개인에게 자신에 대한 검색결과에 대한 부분 거부 조항을 준 것과 같다”고 평가했다. ‘인터넷 개인 권리’의 저자 폴 버넬은 “이번 판결은 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권리를 검색엔진의 비즈니스 모델과 일부 표현의 자유보다 더 우선시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유럽의 이번 판결로 구글을 비롯해 검색엔진 ‘빙’을 운영하는 마이크로소프트, 야후, 페이스북 등 미국 인터넷 기업을 중심으로 정보 삭제를 요구하는 건들이 대폭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른 기업의 비용 증가는 물론이고 어디까지 잊혀질 권리가 인정돼야 하는지도 모호하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국내 상황은
우리나라에서는 사용자가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에 개인정보 관련 게시물을 삭제 요청했을 때 즉시 지워주도록 하는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새누리당 이노근 의원이 발의한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은 개인정보가 담긴 글을 본인이 직접 삭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해당 법안이 통과되면 인터넷에 올린 사적인 글과 사진 등의 정보를 개인 차원에서 통제할 수 있게 된다.
현행법은 ‘사생활 침해’나 ‘명예훼손’이 있는 경우로만 제한하고 있다. 현재 인터넷 게시글에 대해 개인이나 단체가 포털업체에 삭제를 요청하면 포털은 게시글을 통한 권리침해 여부가 불명확할 경우 30일 동안 해당 글을 보이지 않게 차단하는 ‘임시조치’를 취할 수 있다. 특별한 이의제기가 없을 경우 30일이 지나면 해당 글은 삭제 처리된다.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에 따르면 연도별 임시조치 건수는 2008년 9만2638건에서 지난해 24만건으로 증가 추세다.
국내 업계 관계자는 “국내에서도 관련 법규가 없지는 않지만 법의 적용을 보다 명확하게 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다”며 “잊혀질 권리가 인터넷 기업 정책으로 자리잡으려면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미나기자 mina@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