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애플 아이폰이 시장에 확산되기 시작할 무렵, 뜨거운 화제가 됐던 애플리케이션(앱) 중 하나로 ‘범프’가 있었다. 아이폰 두 개를 서로 부딪히면 사진과 명함, 연락처 등 정보가 한 아이폰에서 다른 아이폰으로 옮겨지는 앱이다. 이 앱은 스마트폰 초창기 시장에서 한창 인기를 끌다가 동명의 앱 운영 기업이 지난해 9월 구글에 인수된 후 석달만에 서비스를 종료했다.

‘범프’는 마치 스마트폰 단말기가 데이터를 주고받는 것 같은 마술을 보여줬다. 하지만 기술 구조를 뜯어보면 그렇지 않다. 통신망과 GPS를 통해 송신 스마트폰과 수신 스마트폰의 정보가 서버로 전송되고, 뒤이어 한 스마트폰에서 다른 스마트폰으로 전송하려는 파일 역시 서버로 보내진다. 그리고 두 단말기를 부딪히면 단말기 내 센서가 움직임을 인식, 서버에 있는 전송 파일을 수신 스마트폰에 보내주는 식이다.

이를 두고 데이비드 리엡 당시 범프 CEO는 “우리는 이면의 수학, 데이터 프로세싱, 알고리즘의 혁신을 통해 마술처럼 느껴지는 경험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왔다”고 말했다.

◇LTE D2D, 범프의 마술을 현실로 만들다

‘범프’의 마술이 소비자 손길을 사로잡기 시작한 지 약 4년 후인 지난 1월, 우리나라 대전에 있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는 ‘롱텀에벌루션(LTE) 기기간 통신(D2D)’ 시연이 세계 최초로 성공했다. 초고속 이동통신 네트워크 기술인 LTE를 이용, 기기간 직접 통신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LTE-D2D 기술 상용화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차세대 LTE 표준 로드맵(R12)에 D2D 기술이 포함되고 퀄컴을 비롯한 모바일 생태계의 패권 기업이 잇달아 기술 개발에 나서면서 기지국을 거치지 않고 스마트폰 기기간 직접 통신하는 것이 가능한 세상이 오게 됐다. 통신업계 관계자는 “LTE 기술 로드맵에 따라 2~3년 안에는 LTE D2D가 본격적으로 상용화될 것”으로 내다봤다.

4년 전 ‘범프’ 열풍은 스마트폰 사용자의 D2D 통신을 얼마나 원하는 지를 보여줬다. ‘범프’ 이후 10㎝ 이내의 기기 간 통신인 근거리무선통신(NFC), 반경 10미터 정도의 사정거리를 가진 블루투스, 수십미터까지 가능한 와이파이 다이렉트(WiFi-Direct)가 잇달아 선보였지만 LTE는 500m에서 최대 1㎞에 이르는 차원이 다른 사정거리를 자랑한다. 속도 역시 비교할 바가 못 된다. 블루투스 등 기존 기술과 달리 배터리 수명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시장의 강자인 퀄컴은 세계 기업 중 D2D와 관련해 가장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퀄컴은 지난달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 2014’에서 독일 도이치텔레콤과 협력해 LTE D2D 기술을 구현한 데모를 전시했다. 도이치텔레콤 측은 “조만간 퀄컴 기술을 활용해 시범 서비스를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지국 필요 없는’ D2D 기술 개발될 전망

LTE-D2D 가장 큰 이점은 기지국에 트래픽이 몰려 속도가 느려지는 현상을 어느 정도 줄여줄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까지 고안된 기술에 따르면 LTE D2D 통신망에서 기지국은 데이터 트래픽을 실어 나르는 게 아니라 직접 통신하려는 스마트폰 단말기를 인증하고 거리, 위치, 신호 세기 등의 정보를 통해 D2D 통신이 적합한지에 대한 판단 역할만 한다. 스마트폰 단말기 하나하나가 일종의 기지국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말기 인접성 기반의 공간적 주파수 재사용’으로 설명된다. 또 기지국과 직접 송수신하는 양이 상대적으로 줄면서 단말기의 전력 사용량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인증과 과금 등을 기지국이 담당하기 때문에 D2D 통신을 하고 있는 스마트폰도 기지국과 주기적으로 제어 신호를 주고받게 된다. 통신업계는 향후에는 이처럼 기지국의 필수 역할마저도 거의 필요 없는 LTE D2D 기술이 개발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과금 문제가 기지국과의 데이터량 정보에 대한 송수신이 아닌 소프트웨어적 방법으로 이뤄지는 등 기지국 사용 필요성을 기술 개발로 줄여나가면 진정한 D2D 통신이 실현될 수 있다”고 말했다.

LTE D2D를 이용하면 어떤 서비스가 가능할까. 블루투스처럼 음원 실시간 스트리밍 서비스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해선 곤란하다. 인접 단말기와의 멀티미디어 콘텐츠 공유 서비스부터 반경 수백미터 내에 있는 친구 찾기, 인근 지역 상점과 연계한 광고 서비스, 차량 간 거리 정보나 사고 발생 시 자동 알림을 주는 서비스 등 다양한 새로운 서비스가 쏟아져 나올 전망이다.

인공지능 로봇 간의 통신이나 재난·재해 시 비상통신망으로 활용하기에도 적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인구 밀도가 높은데다 전체 가입자 중 LTE 가입자 비중이 절반에 가까운 우리나라는 LTE D2D 기술을 구현하는 데 최적지로 꼽힌다. 통신업계 관계자는 “강남이나 명동과 같은 인파가 많이 몰리는 지역에서 LTE D2D 기술을 응용하면 상당한 부가가치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기존 통신 보안 체계 등이 적용될 수 없다는 점에서 치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세계 이동통신 표준화 단체인 3GPP는 “통신기록에 관련된 각 나라의 법률이나 해킹 대책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기기 간 통신 중 제3의 기기에서 정보를 빼내가는 등 보안 문제가 불거질 가능성도 높다.


황태호기자 thhw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