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일 한국반도체산업협회가 판교 신사옥 이전식을 열었다. 판교역에서 200m가량 떨어진 협회 빌딩 부지는 평당 분양가가 2000만원에 이르는 금싸라기 땅이다. 회원사 회비로 운영되는 협회는 그동안 쌓아놓은 막대한 이익 유보금으로 사옥을 짓고 입주식을 가졌다.
메모리반도체·시스템반도체가 각각 매출액 기준 전 세계 1위·4위라니 자축할 법도 하다.
그런데 국내 반도체 산업의 현실은 협회의 이런 분위기와 딴판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는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그 후방 산업인 장비·부품·소재 업계는 고사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치킨게임 이후 메모리 업계는 설비 투자에 나서지 않고 있다. 첨단 라인을 중국에 내보면서 국내 투자는 더욱 요원하다.
시스템반도체 업계도 사정은 비슷하다. 정부가 발표한 숫자 역시 착시 효과일 뿐이다. 지난 2분기 국내 시스템반도체 전체 매출액(해외 수출 포함) 3조8000억원 중 3조1800억원은 삼성전자가 거뒀다. 동부하이텍·매그나칩 등 파운드리 업체를 제외하면 중소기업 매출은 약 2650억원에 불과하다. 2000억원대 시장을 놓고 200여개 팹리스·후공정 업체들이 경쟁하는 구도다. 그마저도 글로벌 업체들의 시스템온칩(SoC) 안에 흡수되는 추세여서 점점 시장을 잃어가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협회가 발로 뛰며 반도체 산업 현장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노력이 있는지 의문이다. 업계 의견을 수집하는 창구 역할이라도 제대로 했으면 정부도 재탕·삼탕에 불과한 반도체 정책을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역할에 아주 충실했다 해도 중소 반도체 업체들이 어려움에 빠진 지금 화려한 사옥 이전식을 치르는 일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24일은 `반도체의 날`이다. 협회는 서울 63빌딩에 500여명을 불러 또 한 번 축하 행사를 한다. 서로 독려하고 힘을 북돋워주는 것은 반길 일이다. 이 자리에서만큼은 실제 산업 종사자들이 들러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오은지기자 onz@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