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상돈의 인사이트]스마트폰과 손목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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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한 국산 휴대폰이 기네스북에 오른 적이 있다. 삼성전자가 출시한 손목시계형 와치(Watch)폰이다. 일명 `007 제임스 본드` 폰으로 불린 이 제품(모델명 SPH-WP10)은 39g 초경량인데도 90분 동안 연속 통화할 수 있어 세계 언론에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시장성이 낮아 전시회나 기념품용으로 일부 한정 물량만 생산되고 지금은 공급이 중단됐다. 또 2002년 컴덱스 기조연설에서 빌 게이츠 당시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인터넷 검색 기능을 갖춘 손목시계를 차세대 제품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텔슨전자도 2003년에 성능과 디자인을 개선한 목걸이형 블루투스 와치폰을 출시했다. 하지만 텔슨이 중국발 악재로 쓰러지면서 와치폰은 시장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이후 정보기술(IT) 업체들은 휴대폰과 시계를 통째로 결합하는 무모한(?) 실험을 중단했다. 그 대신에 `프라다링크(LG전자)` `MN2(소니모바일)` `모토액티브(모토로라)` 등 휴대폰과 연동하는 액세서리형 손목시계가 주를 이룬다. 일본 시계 업체인 카시오가 최근 선보인 제품도 블루투스로 스마트폰과 연결되는 손목시계다. 카메라, MP3플레이어, 내비게이션, 모바일TV 등은 전체 기능이 휴대폰 속으로 빨려 들어간 데 반해 시계는 독립 상품으로서 가치를 계속 유지하는 셈이다.

시장과 기술 변화를 초월해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상품은 어떻게 탄생해 유지되는가. 손목시계는 단순한 기능성 제품이 아니다. 기계적으로 간단하면서도 나름 독특한 역사적 사실(스토리)을 가진 존재다. 시계는 바늘을 움직이기 위한 `동력` 장치와 일정 속도로 시간을 재기 위한 `조속기`, 그리고 시간을 표시하는 `표시기`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이들 부품은 지난 수백 년간 기술 변화에 따라 기계식(아날로그)에서 정보기기(디지털)로 탈바꿈했다.

기계식 시계는 1903년 스위스 오메가(Omega)가 손목시계를 상품화하면서 20세기 중반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전지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모터가 등장하면서 근본적인 변화의 계기를 맞는다. 기계식 시계 업체 대부분이 존폐의 위기를 맞이했고, 미국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회사는 타이맥스(Timex) 하나뿐이다. 스위스 제조업체들도 기계식 시계가 `개성 있는 장식품`으로 재평가받기까지 20년간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

이후 일반용 손목시계는 싸면서도 기능이 뛰어난 전자식 제품이 주류를 이룬다. 반면에 유명 브랜드를 강조하는 고급 모델은 전자기술을 접목한 기계식 손목시계가 인기를 끌면서 시장 구조가 양극화됐다. 스위스 시계 회사들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전투기 조종사들이 착용했던 시계라는 스토리를 마케팅에 활용한다. 이는 독창적인 기능이나 품질 차원을 넘어선다. 70년 전에 조종사들이 찼으므로 21세기 소비자도 자동차 한 대 값의 시계 가격을 받아들이라는 마케팅 전략은 희한하게도 잘 먹힌다.

아이팟보다 더 비싼 가죽 케이스가 불티나게 팔리는 것도 같은 이유다. 얼핏 보면 젊고 유행에 민감한 IT 제품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수많은 아이팟 이용자들이 배보다 큰 배꼽을 사들였다. 일종의 허영이 섞였을지 몰라도 자신의 아이팟은 단순한 IT기기를 넘어 소중한 음악과 추억이 담긴 제품이기에 훨씬 더 비싼 케이스에 과감히 지갑을 연다.

나만의 스토리로 소비자의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해 지속적인 생명력을 가지는 제품. 소비자에게 가격 이상의 실용적 기능과 뚜렷한 상징적 가치를 동시에 주는 존재. 그것이 시계와 휴대폰의 차이점이다. 위성위치확인(GPS)으로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스마트폰이 존재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나만의 손목시계가 필요하다.


주상돈 벤처경제총괄 부국장 sdjoo@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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