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산원(NCA, 현 한국정보화진흥원) 설립과 이후 활동은 우리나라 정보화 역사의 핵심 축이다.

한국전산원은 1987년 1월 30일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의 감리·표준화 기관으로 출발했다. 정보사회의 환경변화 속에 2006년 한국정보사회진흥원(NIA)으로 명칭을 바꿨고, 2009년에는 한국정보문화진흥원을 통합해 현재의 한국정보화진흥원(NIA)에 이르기까지 25년여를 우리나라 ICT 대표 기관으로 자리매김 해왔다.

[100대 사건_014] 한국전산원(현 한국정보화진흥원) 출범 <198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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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월 30일 `정보화 강국 코리아`를 설계하고 이끌어갈 한국전산원이 설립됐다.

초고속 국가망 사업, 전자정부 구축, 정보통신 정책 개발 지원 및 u코리아 기본계획 수립 등 굵직한 정보화 사업에서 한국전산원은 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동시에 정보화·정보통신 기술지원을 넘어 주요 정책개발과 수립의 핵심 브레인 역할을 맡아왔다.

2007년 한국정보사회진흥원 20주년을 맞아 발간한 `NIA 20년사-IT를 안아 u세상으로`에는 과거 한국전산원의 핵심 역할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대표적으로 △국가정보화의 기본법 또는 모법으로 일컬어지는 `정보화촉진기본법`(1995년) △IMF라는 초유의 국가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내용을 담은 `사이버코리아21`(1999년) △IMF 극복 이후 성과 중심의 정보화와 세계화를 골자로 한 `e코리아 비전 2006`(2002년) △IT 신성장동력 창출로 경기 활성화를 꾀한 `브로드밴드 IT코리아 비전 2007`(2003년) △세계 최초의 유비쿼터스 사회 실현과 선진복지 한국 건설의 비전을 담은 `u코리아 기본계획`(2006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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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산원 개원 축하연. 한국전산원 탄생에는 정보통신·행정·기업 부문에 걸쳐 수많은 IT인의 관심과 지원이 있었다.

◇정보화 강국 첫 걸음을 떼다=한국전산원 출범은 국가기간전산망(행정전산망) 사업이 토대가 됐다. 초대원장은 과기처 장관과 체신부 장관을 역임한 김성진 박사가 맡았고, 김 박사는 전산원장과 전산망조정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했다.

초기 업무는 제1차 행정전산망사업(1986~1991년)의 감리 수행과 국가 정보화 중장기 계획 수립, 정보사회에 대비한 각종 선행연구, 그리고 당시 국가정보화의 정점에 있던 전산망조정위원회 지원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선(先) 투자 후(後) 정산`이라는 당시로서는 독특한 재원조달 방식으로 추진한 행정전산망사업에서 전산원의 감리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한국전산원은 이 사업을 시작으로 각종 공공기관의 전산·정보시스템 감리를 맡는다. 동시에 감리 지침·기준 도입, 감리인력 양성, 감리체계 및 해설서 마련, 나아가 공공부문의 감리제도 활성화 및 부실감리 방지 등 감리부문의 제도적 기반 마련에 주력했다. 그 결과는 `정보시스템의 효율적 도입, 운영 등에 관한 법률`(2005년) 제정으로 이어진다.

감리와 함께 전산망 표준 개념과 기반을 정립했고, 정부개방시스템(GOSIP-K)을 비롯, 전산망 각 분야의 표준을 연구했다. 표준은 전산망사업의 관건이라 할 만큼 중요했지만 전산원이 착수하기 전까지는 불모지에 가까운 분야였다. 이후 1993년 우리나라 최초로 전산망 표준이 제정 고시되기에 이른다.

이와 함께 정보화 관련 중장기 계획 수립과 각종 선행 연구는 전산원 고유 업무로 자리매김돼 정보통신부 등 정보화 담당 부처의 정책 수립 과정에서 핵심 브레인 역할을 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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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산원은 1996년 3월 27~28일 서울 COEX에서 '초고속국가망 응용서비스 종합시연 및 국제세미나'를 개최했다. 시연회에서 초고속국가망 공공응용서비스 개발사업으로 완료한 26개 과제에 대한 평가와 서비스 보급·활용을 촉진하기 위한 방안이 논의됐다.

◇IT강국 초석, 국가 전산망을 구축하다=1990대 들어 전산원은 `전산망 기술지원`이라는 중대한 임무를 맡게 되면서 기존 이론적 선행연구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기술 분야로 기능이 확장된다.

이미 구축한 제1차 행정전산망에 이어 새로 출범한 제2차 행정전산망사업(1992~1996년)에서 전산망 운영지원, 응용SW 유지보수, 주전산기 안정화와 이용기술 개발과 보급, 신규 전산화 기술지원, 정보화 촉진을 위한 시범사업 수행, 각 부처 전산요원의 교육 등 각종 기술지원 활동을 전개했다.

1992년 4대 원장으로 부임한 경상현 원장(정보통신부 장관 역임, 현 KAIST 겸직교수)은 8개월의 단기 재임기간 속에 엘리트 연구중심의 전산원을 사업조직으로 일신하고, 차세대 전산망사업 추진 등 새로운 진로와 역할을 정립했다.

1993년 5대 이철수 원장 취임과 함께 전산원은 우리나라 정보화사업의 지평을 넓히는 획기적인 사업을 발굴 추진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것이 초고속정보통신기반구축사업의 발굴과 추진이다.

전 세계가 정보고속도로를 앞다퉈 구축하는 가운데 한국전산원은 이 사업의 기본계획부터 종합계획까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IT강국의 초석이 된 초고속정보통신망사업은 1995년부터 2005년까지 11년 동안 8000억여원을 투입, 전국 144개 지역에 2만㎞에 이르는 최첨단 광케이블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 사업은 3만2000여 공공기관의 정보화를 촉진했고, 지식 정보화 사회의 대동맥으로 `IT코리아`의 성장발판이 됐다.

2000년대 들어 7대 박성득 원장과 8·9대 서삼영 원장을 거치면서 한국전산원은 본격화된 전자정부구축 전담기관으로 전자정부 11대 과제, 전자정부로드맵 31대 과제를 추진했다. 그 결과 2005년 UN 발표에서 우리나라 전자정부의 수준은 세계 5위에 도달했다.

초고속정보통신망구축과 전자정부 사업은 우리나라 ICT산업에서 가장 선구적 사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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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0월 한국전산원은 공공기관의 정보 공동 활용을 목적으로 정보연계센터를 설립했다.

◇국가정보화지수 세계 정상급으로 끌어 올려=정부부처의 정보 공동활용, 인터넷 활성화, 전산보안 분야 개척은 전산원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당시 부처 이기주의로 지연돼 온 정보 공동 활용에서 각종 실천 방안을 제시해 여권발급망(1993년), 국토정보센터(1994년) 등 시범사업을 유도해냈다. 1994년에는 우리나라 인터넷 관문기관(KRNIC)으로서 인터넷 활성화와 체계화를 뒷받침했다. 국가기간망정보센터 구축은 정부기관과 공공기관에 인터넷을 도입·확산시켰다. 전산보안 분야 토대를 닦은 것도 이 시기다.

1995년 정보통신부 출범으로 우리나라 정보화사업 추진체계는 일원화됐다. 동시에 전산원의 위상도 크게 강화된다.

정통부 출범과 함께 전산원은 초고속정보통신국가망 구축, 초고속 공공 응용서비스 개발, 원격시범사업 구축 등의 핵심 전담기관을 맡게 된다. 그해 7월에는 정보화촉진기본법에 의해 국가사회정보화의 전문기술지원기관으로 지정됐다.


한국전산원의 활동성과는 이후 여러 지표에서 나타나고 있다. 세계 각국의 정보화 수준을 비교·평가하는 국가정보화지수에서 우리나라는 매년 상위권에 올랐다. 정보화 수준의 사회적 균형을 의미하는 디지털기회지수도 2008년까지 OECD국가 중 3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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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수 전 한국전산원장

◆ 이철수 한국전산원 제5·6대 원장(현 정보시스템감리협회장)

“한국전산원은 우리나라 정보화 역사에서 도약과 성장기의 중심에 있던 기관이다.”

이철수 전 한국전산원장(67·현 정보시스템감리협회장)은 “1980년대 후반 국가기간전산망 구축 등 우리나라가 정보화를 역동적으로 추진할 때 최일선에서 각 부처와 업계, 학계 등 의견을 수렴해 필요한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겼다”고 말했다.

김성진 초대원장이 전산원 조직과 기능의 토대를 닦고, 이어 경상현 4대 원장이 전산원 역할과 기능 확대의 발판을 마련했다면 이 원장은 이를 실행에 옮겨 전산원을 우리나라 정보화 분야의 핵심 기관으로 자리 잡도록 이끈 주인공이다.

이 원장은 역대 원장을 떠올리며 “김 초대원장은 정보화 분야 최고 엘리트를 모아 전산원을 최고 전문가 집단으로 만든 분이고, 경 원장은 8개월 동안 재임하다 정통부 설립과 함께 차관으로 가셨지만 전산원의 향후 역할과 기능을 대폭 확대시켜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신 분”이라 설명했다.

설립 초기 20여명으로 출발한 한국전산원은 경상현 원장 재임 시절 연 예산 60억원에 60여명 규모로 확대됐고, 이철수 원장의 임기 끝 무렵인 1998년에는 예산 4000억원을 주무르는 250여명의 거대 조직으로 성장한다.

“당시 국가 정보화 인프라 구축에서 심화, 확산, 응용 등 정보화 및 정보기술 분야의 핵심 정책 초안의 대부분을 전산원이 담당했다. 모든 정부부처와 공공기관, 기업까지 전산원에 정보화 및 정보기술 관련 크고 작은 일의 자문을 구했다.” 이 원장의 말에서 당시 전산원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이 원장은 “정보화 관련 신규 전문센터나 조직을 구성할 때면 반드시 전문가가 필요하다며 정부에 대고 소신의 목소리를 낸 곳도 전산원이었다”면서 “우리나라 ICT정책을 주도하는 최고의 전문가 집단이라는 자부심 속에 일했다”고 회상했다.

현재의 영상회의, 원격의료, 원격교육 등 네트워크 기반의 첨단 상용화 서비스의 상당수는 당시 전산원의 계획과 시범사업에서 나왔다.

이 원장은 인터뷰에서 전산원의 앞선 정보화 식견을 보여주는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1990년대 초반 전산원의 초고속전산망구축사업과 관련해 감사원은 인프라 구축을 제대로 안한 상태에서 사업비를 지출했고, 사업 효과도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전체 사업비의 80%를 회수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사업비를 먼저 투입해 단계적으로 망을 구축하고 이를 중장기적으로 활용해 사업 효과를 거두게 되는 네트워크 인프라 사업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였다. 전산원은 당시 이례적으로 재심을 신청했고, 최종 판결이 나올 때까지 사업을 밀어붙였다. 결국 10년이 지난 김대중 정부 시절 들어 망 구축 효과가 나타나면서 유효한 사업으로 재평가를 받았다.”

이 원장은 “지금도 그렇지만 정보화사업은 부처 간 이기주의는 물론이고 외부 기관 및 관계자들이 정보화 업무의 전문성과 특성을 이해하지 못해 발생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많았다. 지금이야 웃고 넘어가지만 당시만 해도 그 스트레스는 상당했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한국전산원 설립과 활동에는 정보화를 향한 각계의 생생하고 치열한 모습이 녹아 있다”며 “우리나라 정보화사업의 역사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국가사회 정보화의 숨은 일꾼으로서 한국전산원이 담당했던 역할과 성과, 품었던 계획과 포부를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표] 한국전산원 발자취


임동식기자 dslim@etnews.com
임동식기자 dsl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