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11일. 전자신문 1면 `중국, 이번에는 한글공정 나서나` 보도가 나가자 인터넷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네티즌들은 포털 사이드 다음 아고라에서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네티즌 2만 여명이 인터넷 청원을 하기에 이르렀다.
`중국, 이번에는 한글공정 나서나`란 기사는 세계적인 한글을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한 우리 정부의 주먹구구식 대응을 파헤친 내용이었다.
당시 한글날을 앞두고 한국을 방문한 현룡운 조선어정보학회회장을 만난 기자는 중국이 조선어 정보기술표준화에 나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중국이 소수민족인 조선족을 위해 휴대기기 조선어 입력 자판을 표준화한다는 내용이었다.
현룡운 회장은 조선족으로 중국 옌볜대 교수였는데 2010년 10월 9일 564돌 한글날을 맞아 세종대왕릉이 있는 여주의 한국어정보학회에 참석차 방문했다. 그는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어국가표준워킹그룹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중국에 살고 있었지만 중국이 한글 표준화에 먼저 나서는 것은 향후 한국 위상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판단, 이 같은 내용을 제보했다.
현 회장은 중국은 중국 내 소수민족 언어의 정보기술표준화 작업을 진행 중이며 조선어도 포함된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어(사실상의 한글)는 중국과 한국, 북한 3개 문화권을 아우르는 언어로 중국의 이 같은 움직임은 향후 한글을 둘러싼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입지를 좁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중국은 자국 내 소수민족 언어의 표준을 정립해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어 우리 정부가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함께 참석한 진용옥 한국어정보학회장 역시 중국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진 회장은 한국 정부가 10년 넘게 휴대폰 한글입력 방식을 표준화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관련 정부부처가 중국의 이 같은 움직임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꼬집었다. 그는 이미 중국 학계가 표준화 연구를 시작했고 한국 정부에 협조를 요청한 사실을 학계는 모두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자신문은 이 내용을 바탕으로 첨단 IT기기 한글 입력 방식을 중국에 빼앗길 우려가 높다는 기사를 10월 11일자 1면에 보도했다. 이 기사는 우수한 한글을 가진 민족으로서 향후 한글을 체계화하고 세계화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자 작성됐다. 또 우리 정부가 중국의 조선어 입력 방식 표준화에 적극 대응하기를 촉구했다.
이 기사의 반응은 뜨거웠다. 네티즌이 제일 먼저 움직였다. 한글 표준화를 중국이 주도하게 둘 수 없다며 인터넷 청원 운동이 시작됐다. 소설과 이외수씨 등이 트위터에 의견을 남기며 여론이 집중됐다.
이런 가운데 관련 부처인 지식경제부에서 조속한 시일 안에 휴대폰 한글 입력 방식을 표준화하겠다고 밝혔으며 한나라당 역시 표준화에 적극 개입했다.
이 기사를 시발점으로 지난 1년여를 끌어온 휴대폰 한글입력 자판 표준화에 전기가 마련됐다. 지식경제부는 2009년부터 휴대폰 한글자판 표준화 작업을 해왔지만 400여개 특허와 통신사, 단말기 제조 기업 등의 견해 차이가 커 표준안 마련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이 기사가 이슈화되면서 각계각층에서 휴대폰 한글 입력 방식 표준화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자 자신들의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했던 기업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치 이슈화되면서 개인 특허권자와 업체에서 국가표준 제정에 필요하다면 한글입력 방식 특허권을 무료로 공개할 수 있다는 선언이 이어졌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느 때보다도 한글표준화를 위한 좋은 여건이 만들어졌다.
이에 한나라당은 2010년 12월 2일 국회에서 `모바일 정보기기 한글문자판 표준화 추진 공청회`를 열었다.
특허권 무료 공개 포문은 벤처기업 사장이 열었다. 천지인 특허권자 중 한 명인 조관현 아이디엔 사장이 자신의 특허권을 정부에 기증한 것을 시작으로 시장 점유율 75%를 차지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KT가 각각 천지인과 나랏글 특허 개방을 선언했다. 특히, 이들 기업은 민간 주도로 휴대폰 한글입력 표준화 포럼을 설립해 표준화에 적극 동참하기로 했다.
2011년 3월 23일 방송통신위원회는 일반 휴대폰에는 천지인 단일표준을, 스마트폰에는 천지인, 나랏글, 스카이 복수표준을 국가표준으로 채택하는 방안을 확정했다. 한 가지 자판만 탑재할 수 있는 일반 휴대폰은 국민 선호도가 가장 높은 천지인으로 통일했다. 여러 가지 자판을 탑재할 수 있는 스마트폰은 천지인, 나랏글, 스카이 모두를 탑재해 소비자 선택권을 최대한 보장했다.
기존 상용화된 방식 중 표준을 정하는 1단계 표준화의 정책방안을 확정했다. 2단계에서는 민간포럼 운영을 통해 미래형 한글자판 표준안을 도출한다.
◆ 진용옥 한국어정보학회장
“일반인은 쓰기 편하고 간편한 한글자판 표준을 원합니다. 시장 점유율에 의존한 표준화가 아니라 속도와 정확성 등을 감안해야 합니다. 국제표준화 특히 한국, 중국, 북한 3국의 공용화도 생각해야 합니다.”
진용옥 한국어정보학회장은 2010년 10월 중국이 조선어 정보기술 표준화에 나섰다는 사실을 알고 대책 마련에 부심했던 인물이다. 당시 중국의 구체적인 움직임을 전했던 현룡운 조선어정보학회장과 함께 한국 정부의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진 회장은 2010년 한글공정 보도가 나갔을 때 자칫 중국과 외교 분쟁을 우려해 네티즌의 감정적인 반응 자제를 호소했었다.
“중국에서 `조선어문`은 중국 소수민족인 조선족이 사용하는 자국어고 중국의 5대 법정 문자로 채택했습니다. 중국은 조선어문 연구와 발전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진 회장은 중국이 먼저 한글의 장점과 특징을 살린 자판을 만들고 국제 표준으로 정하면 안 되기에 문제를 제기하고 걱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안타깝게도 한글의 주인인 우리가 먼저 한글의 장점과 특징을 살린 제대로 된 휴대폰 표준 자판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는 “당시 기사를 시발점으로 수년간 진척이 없던 휴대폰 한글 입력 자판 표준화에 전기가 마련됐다”며 “정치권과 청와대, 관련 부처에서 관심을 갖고 업무를 추진한 것은 수확이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부의 후속 대책엔 아쉬움을 토로했다.
정부는 1차와 2차로 나눠 휴대폰 한글자판 표준화를 추진했다.
그는 “1차, 2차로 단계 표준화하는 것은 혼란의 우려가 있다”며 “두 번에 걸쳐 표준화를 하는 것보다 한번만 제대로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강조했다. 진 회장 등 한국어정보학회의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표준화는 2단계로 이뤄졌다.
그는 “한글공정이란 표현으로 일시적으로 일반 대중의 관심을 촉발했으나 휴대폰 한글 입력 방식 표준화에 대한 대중의 의견을 이끌어내는 데는 미흡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진 회장은 기존 휴대폰에서 쓰던 방식 대신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휴대폰 한글자판 표준화를 추진했다. 국제 표준에 부합하면서도 사람들이 보다 편리하고 빠르게 입력할 수 있는 방식을 제안했다.
사람들이 많이 쓴다는 이유만으로 표준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엉터리 표준안을 만들면 안 만드는 것만 못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존 업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방식으로는 옛글을 표현할 수 없을 뿐더러 글로벌 규격과 매칭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며 “국내에서 사용하긴 적당하지만 한글 세계화를 위해선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진 회장은 “중국 인민일보에서도 관련 내용을 보도하는 등 이 사건은 국제적인 관심사였다”며 “한글로 인한 국익과 국격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고 말했다.
[표] 한글공정 일지
10월 11일 전자신문 기사 보도 문제 제기
10월 12일 인터넷 포털 다음 아고라 서명운동 시작
10월 14일 정부 한글자판 표준화 적극 개입
10월 15일 한나라당 휴대폰 한글자판 `남북 통일` 추진
10월 19일 조관현 아이디엔 사장, 천지인 특허 정부에 전격 기증
10월 19일 한국어정보학회, `한글 통신기기 국내표준과 국제 표준 제정 촉구 기자회견` 개최
10월 20일 KT, 삼성전자 특허 공개 및 민간주도 표준화 포럼 설립 합의
10월 28일 국회 `한글자판 표준화 당정회의` 개최
12월 2일 한나라당 `국민의 편의성 향상을 위한 모바일 정보기기 한글 문자판 표준화 추진 공청회` 개최
2011년 3월 24일 방송통신위원회, 일반 휴대폰-천지인 단일표준, 스마트폰-천지인·나랏글·스카이 복수표준 채택
김인순기자 inso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