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사건_093] 9·15 순환정전 사태 <2011년 9월>

2011년 9월 15일 오후 3시께 일부 교통 신호등이 갑자기 작동을 멈췄다. 공장의 기계들도 순간적으로 가동을 중지했고 아파트 엘리베이터, 상가 조명, 은행 현금입출기도 먹통이 됐다. 9·15 순환정전이 발생한 순간 사람들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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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으로 발생한 9·15 순환정전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예고 없이 찾아온 사고로 그에 따른 충격 또한 컸다. 약 여섯 시간에 걸쳐 발생한 이날의 정전으로 약 13개 시 24만가구(사고 당시 통계)가 크고 작은 피해를 겪었고 인터넷 포털에는 `정전`이 실시간 검색어로 급상승했다. 전력업계는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고 사회적으로는 우리나라가 전력부족 국가임을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원인 두고 갑론을박=초유의 순환정전 사태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자연스레 관심은 사고 원인에 맞춰졌다. 사고 당시 한국전력과 전력거래소가 발표한 순환정전 원인은 전국적으로 30도가 넘는 이상 고온 현상과 이에 따른 수요예측 오차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날 날씨는 9월 중순 치고는 이례적으로 일부 지역에 폭염경보가 떨어지고 오전부터 30도를 웃도는 이상 기온이 발생했다.

전력거래소는 전형적인 가을 날씨를 예상하고 수요를 예측했지만 여름을 방불케 하는 고온에 추석연휴를 보내고 현장에 돌아온 사람들이 더위를 못 견디고 냉방전력을 과도하게 사용하면서 전력사용량이 급증했다. 전력거래소는 아침 8시부터 양수발전기를 가동하며 전력수급을 맞추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다수의 발전소가 계획예방 정비를 위해 운전을 중지한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전력거래소는 추석을 기점으로 사실상 무더위가 끝났다고 판단하고 주요 발전설비의 정비를 지시했었다. 그 결과 그해 최대 전력피크인 7313만㎾모다 훨씬 적은 6700만㎾의 최대 전력사용에도 정전사태가 발생했다.

순환정전이 가져온 사회적 여파가 크다 보니 원인 규명에서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한 보안회사는 기자간담회에서 순환정전 관련 북한 해킹 가능성을 제기했다가 불과 몇 시간 만에 번복하기도 했다. 전력업계에서는 전력시장 구조개편으로 계통운영과 배전이 전력거래소와 한국전력으로 분리된 것이 정전사고의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기관 통합을 주장하는 의견도 있었다.

9·15 순환정전의 공식적인 최종 결론은 근무태만과 보고 소홀이 빚은 `후진국형 인재의 종합판`이었다. 순환정전 이후 열린 국정감사에서 지식경제위원회는 지식경제부, 한국전력, 전력거래소 간 정보 소통 부족, 느슨한 보고체계를 집중적으로 추궁, 책임을 물었다. 이 일로 전력거래소 이사장을 비롯한 한국전력 사장, 지식경제부 장관부터 차관, 실장, 국장, 과장에까지 이르는 전력라인 모두가 교체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전기요금 현실화 이슈 점화=정부와 정치권이 순환정전의 `원인`을 인재로 규명하는 사이, 학계와 산업계는 더욱 근원적인 대안 마련을 요구했다. 분명 인적 실수와 근무태만 요인이 있긴 하지만 국내 전력 전반의 체질개선이 없다면 제2, 제3의 순환정전 사태가 찾아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가장 많은 논란을 이끈 이슈는 전기요금이다. 전력업계는 전력공급능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전기요금이 원가 이하로 다른 공공요금에 비해 낮게 책정되면서 전력과소비를 부추긴 것이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지적했다. 당장 다가올 겨울철 전력수급을 거론하며 전기요금 인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발전소는 건설기간이 필요한 만큼 당장 수급안정화를 위해선 요금인상에 따른 수요억제가 필요하다는 해석이었다.

순환정전 문제가 일부 관련자들의 책임론에서 끝나지 않고 전력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외부로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는 점은 전력산업계에는 전화위복이었다. 그동안 전기요금 인상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지만 이는 정부의 물가안정 정책으로 인해 업계가 공론화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공급부족과 수요과다로 순환정전 사태가 벌어졌고 그해 겨울에는 총체적인 전력부족으로 대정전 사태까지 우려되면서 결국 정부는 한 해에 전기요금을 두 번이나 인상하는 이례적인 결단을 내렸다. 현행 전기요금은 아직 원가 이하 수준으로 전력수급 위기 상황이 닥칠 때마다 논란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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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위기는 현재진행형=순환정전 이후 정부가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재발방지 대책 마련이었다. 총리실을 중심으로 지식경제부, 행정안전부, 소방방재청, 한국전력공사, 전력거래소 등이 합동 점검단을 구성해 정전 대응체계를 전면 재점검하고 유관기관 협조체제를 강화했다. 기관별 위기대응 매뉴얼을 통일했으며 민방위훈련을 통해 전국적인 정전대비 훈련을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정전위기는 도사리고 있다. 혹한·혹서기 때에는 매번 전력이 부족해 절전을 권유하고 절감량만큼 지원금을 주는 수요관리시장으로 수요조정을 하고 있으며 각 발전소도 정비를 미룬 채 연일 가동하고 있다. 발전소 정비는 계속되는 피크로 그 일정을 제때 잡지 못하면서 설비에 무리가 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정부는 추가 원전건설이 완료되는 2014년 말께에 국내 전력상황이 여유를 찾을 것이라는 전망이지만, 국민의 원전 반대여론이 강해 이 또한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원전 이외의 발전소 역시 지자체 및 지역 주민들과의 부지 사용 갈등으로 난항을 겪고 있다. 여기에 송전라인도 포화상태로 추가 송전탑 건설이 필요한 것도 부담이다. 전력공급력 확대를 위해선 많은 부분에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상황이지만 아직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전력업계는 순환정전 위기가 다시 찾아올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현장에서는 “오늘도 무사히”라는 말이 입버릇처럼 나올 정도다. 전기요금은 아직 원가 이하 상황에 머물고 있고 최대 전력사용량은 해마다 피크를 경신하고 있다. 반면에 공급능력 확대 작업은 더디기만 하다.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상황을 해결할 결단과 대책이 필요하다는 게 전력인들의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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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9·15 전력위기 대응체계 개선 TF단장

◆ 이승훈 9·15 전력위기 대응체계 개선 TF단장(현 서울대 교수)

“시장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전력산업 구조가 갖춰져야 한다.”

이승훈 서울대 교수가 9·15 순환정전 이후 긴급 구성된 `전력위기 대응체계 개선 TF` 단장으로 6개월여간 활동한 후 내린 결론이다.

정전 재발을 사전에 차단하고 전력수급 중장기 로드맵을 마련하기 위해 구성된 `전력위기 대응체계개선 TF`는 원가 이하의 전기요금으로 인한 시장왜곡 문제를 심각하게 고심할 것을 정부에 요청했다. 이 교수는 “시장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단위인 가격이 제대로 산정되지 않다 보니 시장 자체가 전반적으로 왜곡되는 현상을 겪고 있다”며 “TF 활동을 하면서 전기요금 현실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지속적으로 제시했다”고 밝혔다.

이 교수가 우려하는 부분은 낮은 전기요금이 가져올 수 있는 피해의 연쇄반응이다. 낮은 전기요금에 따른 전기과소비와 이로 인한 LNG 등 원가가 비싼 발전기(첨두부하) 가동, 한전의 전력 구매 부담 증가, 전력업계의 수익 불균형 현상 등이다.

특히 첨두부하 발전기 가동으로 구매전력비는 비싸지는 반면에 판매전력비는 원가 이하로 한전의 재정부담이 커지게 되면 설비 추가증설에 필요한 투자가 줄어들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실제 한전은 그동안 한전그룹 발전자회사들에만 적용하던 전력구매요율 조정을 민간사업자에게까지 적용했다. 소매시장에서 시장원칙에 따른 적정 수익을 보장받을 수 없으면서 이를 도매시장에서 제도를 통해 반 강제적으로 메우는 상황이다.

이 교수는 “정부가 전기요금 인상을 억제하려 해도 결국 나머지 인상분이 다른 방법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며 “향후 정전에 대한 우려를 원척적으로 해소하려면 시장원칙에 따른 운영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TF는 물론이고 학회와 산업계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정부 역시 전기요금 조정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다”며 “결론은 정부의 몫이지만 전력 정상화를 위해 필요한 인상폭이 만만치 않은 만큼 작업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정형기자 jeni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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