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2차전지(리튬이온전지) 산업은 올해 큰 성과를 거뒀다. 역대 최대 매출에 지난 20여년 동안 세계 시장을 장악해온 일본을 누르고 1위 달성이 확실시 된다. 시장조사업체인 IIT는 지난 10월 발행한 보고서에서 삼성SDI, LG화학 등 한국 기업들이 올해 40.3%를 점유, 31.8%의 일본을 처음 추월할 것으로 전망했다. 10년이나 늦게 시장에 뛰어들고도 ‘전지 왕국’ 일본을 앞지를 만큼 빠르게 외형을 키운 결과다.
하지만 이 같은 성과는 완제품에 한해서다. 2차전지를 구성하는 핵심 소재로 들어가면 상황은 정반대다. 원천 기술이 부족한 탓에 양극재, 음극재, 분리막, 전해액 등 핵심 소재 대부분을 일본·중국 등 해외 의존하고 있다. 우리나라 2차전지 소재 국산화율은 25%에도 못 미친다는 것이 정부의 통계다.
전지 원가에서 이들 소재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인 데다 2차전지의 차기 수요처로 떠오르고 있는 전기차·전력저장장치(ESS) 등 중대형 전지 시장을 감안하면 이런 불균형은 더욱 커진다. 중대형 전지에 들어가는 소재 사용량은 지금까지 주력 제품인 소형 IT기기용 2차전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기 때문이다.
정부 지원 아래 21일 한국전지산업협회, 한국산업기술평가원, 전자부품연구원, 휘닉스소재, 파낙스이텍 등이 뭉쳐 ‘녹색산업 선도형 2차전지 기술개발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교환한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 이뤄졌다.
한국전지산업협회 최갑홍 부회장은 “2차전지 산업의 취약점으로 지적되던 핵심 소재 분야의 기술력은 물론이고 평가〃분석 인프라 구축 및 제품의 조기 상용화를 추진해야 2차전지의 중장기적인 발전이 가능하다”며 “이제 첫 발을 내딛었다”고 말했다.
◇어떤 과제들이 선정됐나=우선 총 네 가지가 1차연도 과제로 결정됐다. △코발트를 쓰지 않는(Co-free)는 양극소재 개발 △안전하면서도 수명이 긴 기능성 첨가제 및 전해액 개발 △2차전지 소재 분석을 위한 기반 구축 △사업화 연계 및 글로벌마케팅 지원이다. 각각의 과제별로 주관기관과 참여 기업들이 선정됐다.
먼저 코발트를 쓰지 않는 양극재 개발은 휘닉스소재가 주관을 맡는다. 여기에 LG화학, SK이노베이션, 인천화학, 세종대학교, 단국대학교, 한국화학연구원이 참여키로 했다.
양극재는 2차전지 재료비 중 가장 비중이 큰(약 40%) 소재다. 2차전지가 늘어날수록 양극재 사용량도 빠르게 증가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휘닉스소재, 인천화학 등은 양극재 중에서도 코발트 대신 니켈계와 망간계를 혼합한 제품을 만들 계획이다. 고가의 원료인 코발트를 쓰지 않기 때문에 가격절감 효과가 기대된다. 앞으로 4년 내 개발을 완료해 전기자동차와 ESS 등 중대형 배터리를 사용하는 분야에 적용하는 것이 목표다.
기능성 전해액 및 첨가제 개발은 파낙스이텍(주관), 삼성SDI, 충남대학교, 한밭대학교, 한국전기연구원이 맡는다. 이들 기관은 3년 내 안전하면서도 에너지 밀도가 높은 첨가제 및 전해액을 개발할 계획이다.
전해액은 양극과 음극의 이온을 이동하게 하는 매개체다. 2차전지의 4대 핵심 소재 중 하나지만 특유의 휘발성 때문에 폭발의 위험성이 있다. 참여 기관들은 안전하면서도 현재 120~130Wh/kg 수준의 에너지 밀도를 3년 내 200Wh/kg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다. 신규 전해액은 양극재와 마찬가지로 고출력, 장수명 2차전지를 만드는 데 활용될 예정이다.
이번 사업에서는 또 2차전지 소재 및 완제품의 국제적인 평가 인프라가 국내 처음 구축된다는데 의미가 있다.
전자부품연구원은 고도의 평가 장비를 도입해 국제적 평가기관인 SAE, USCAR 등에 버금가는 인프라를 완성하기로 했다.
그동안 2차전지 소재나 완제품은 수요처를 중심으로 평가를 받았다. 그러다보니 기술유출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았다.
전자부품연구원은 자체 분석 장비를 도입으로 기술유출문제는 물론이고 고장 및 열화 원인 등을 분석해 2차전지의 안전성 문제에 대한 신뢰도 개선을 도모할 방침이다.
한국전지산업협회에서는 아울러 제품 상용화와 기술보급을 촉진하기 위한 사업화 연계기반구축 및 글로벌 마케팅 지원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시장 및 기술에 대한 정보 제공과 표준화 동향, 특허 분석 등을 통해 개발 기술의 상용화 및 사업화에 역점을 둘 예정이다.
◇기대 효과는=이번 2차전지 기술개발 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경우 그동안 지속적으로 지적되던 국내 소재 산업 발전에 적잖은 보탬이 될 전망이다.
문신학 지식경제부 과장은 “약 3000억원 규모의 수입대체 효과와 약 1만명의 신규 고용 창출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정부는 2차전지 기술개발 사업을 지속적으로 확대,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연차별 핵심과제를 추가 도출하는 한편 차세대 2차전지 사업단도 발족시켜 산업의 중장기적인 발전을 도모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7년간 총 1300억원의 예산 투입을 계획하고 있다.
하지만 개발된 소재를 얼마나 실제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느냐가 관건으로 보인다. 박상진 한국전지산업협회 회장은 “국내 2차전지 산업은 밸류체인(가치사슬)에 부족한 부분들이 있다”며 핵심 원료부터 소재, 완제품까지의 생태계 조성을 강조한 바 있다.
윤건일기자 beny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