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추운 2013년 겨울 어느 날, 회사원 A씨는 출근하자마자 책상 밑에 있던 개인용 전기난로를 켰다. 중앙집중식 난방으로는 추위를 이기기 힘들기 때문이다. 오전 9시 30분쯤 휴대폰으로 문자 한 통이 들어왔다. 전력 수요가 갑자기 늘어 2011년 9.15정전사태가 재발할 우려가 있으니 난방을 자제해 달라는 재난문자였다. 작년에도 이런 문자가 몇 번 있었지만 괜찮았던 탓에 A씨는 무시하고 업무에 몰입했다. 11시 30분쯤 갑자기 전기난로가 꺼지고 데스크톱 PC와 전등이 차례로 나갔다. A씨는 사무실 전화를 들어 상황을 파악하려 했지만 통화량 증가로 들려오는 소리는 ‘뚜, 뚜, 뚜~’ 뿐이다. 휴대폰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결이 쉽지 않다. 사무실 밖을 내다보니 신호등이 꺼져 거리는 이미 거대한 주차장이 돼 있다.
같은 시각 산업 현장에는 비상이 걸렸다. 9.15정전사태 이후 정기적으로 비상발전기를 점검해 놓은 덕분에 잠시나마 공장 가동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정전이 장기화하면 속수무책이다. 비축해 놓은 연료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지하철·은행·병원·관공서 등도 파행 운영되고 유무선 전화·가스·수도까지 끊기는 블랙아웃이 현실화하면서 수천만 명의 피해와 수십조원의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가상 시나리오지만 당장 올 겨울 실제 상황으로 찾아올 수 있다. 과거 전력 피크는 여름철에만 있었지만 2009년부터는 전기난방 수요가 늘어나면서 겨울철 전기 사용량이 여름보다 늘었다. 사상 최대 전력사용량을 경신 한 것도 여름보다 겨울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겨울철 난방에 주로 써 온 등유는 2002년 이후 수요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경유 소비도 2005년 이후 급격하게 낮아졌다. 반면 전력소비는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요금이 싼 전기를 쓰면 비용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용하기 편리하기 때문에 안 바꿀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연탄이나 석탄 난로를 쓰던 각 급 학교에는 냉난방 겸용 시스템에어컨이 보급된 지 오래다. 서울대만 해도 작년 에너지효율화 사업을 하면서 기숙사 등 건물동 냉난방시설을 에너지효율이 높은 시스템에어컨으로 교체했다. 에너지효율을 높이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 사업을 진행했지만 다른 에너지원을 써도 되는 것 까지 전기를 쓰게 함으로써 전력 소비를 부채질하는 모양새가 됐다.
개별 냉난방기기를 사용하는 중소규모 상업시설이나 사무실도 대부분 등유 대신 전기 냉난방기로 교체했다. 아파트형 공장이 밀집한 서울디지털산업단지(G밸리)만해도 그렇다. 첨단 빌딩이 들어서면서 모두 전기로 냉난방 하도록 했다. 전기요금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농어촌도 양어장이나 비닐하우스 난방에 전기를 사용한지 오래다. 이 모든 상황이 최근 10여년 사이에 바뀌었다.
우리는 지난 9월 약하긴 하지만 정전의 매운맛을 봤다. 피해접수 결과 피해건수 8962건에 610억원의 경제적 피해를 입은 것으로 집계됐다. 신고하지 않은 건수와 국민이 겪은 불편함을 더하면 피해는 더 커진다.
9.15정선사태는 맛보기에 불과하다. 더 심각한 것은 다가올 겨울이다. 우리나라가 보유한 전력공급 능력(7921만㎾)과 최근 2년간 전력소비 증가율을 감안한 올 겨울 전력수요(7947만㎾)를 보면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이제 전력공급량이 늘어나는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에 몰렸다. 추운 겨울 블랙아웃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불행하게도 전기를 아껴 쓰는 일 밖에 없다.
최근 공학한림원 에너지포럼에 참석한 한 원로 엔지니어는 “앞으로 3개월 사이에 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면 곳곳에서 곡소리가 날 것이며 블랙아웃이 올 것을 확신한다”고 경고했다. 원로 엔지니어가 이솝우화 ‘양치기 소년’의 주인공이라도 상관없다. 그의 말대로 ‘살 떨리는’ 준비를 해야 한다.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주문정·그린데일리 부국장 mjjo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