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69>

 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68>

 

 한미통신회담<12>

 

 1996년 7월 26일 금요일.

 한여름 폭염이 대지를 화로불처럼 달구고 있었지만 한미통신관계는 엄동설한이 돌아온 듯 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이날 한국을 종합무역법 및 경쟁법 1374조에 따라 우선협상대상국(PFC)으로 지정한다고 발표했다. 지난 1992년 이후 두 번째 PFC지정이었다. 그해 6월 10일 정보통신부가 신규 PCS사업자를 선정하면서 접속방식을 CDMA를 단일화로 결정한 것도 한 요인이었다.

 미 USTR는 샬린 바셰프스키 대표서리는 A4용지 1장 분량의 짧은 성명서에서 지정배경과 이유를 밝혔다. 그는 “미국은 지난 6개월간 한국시장에 대한 미국산 통신장비의 접근을 어렵게 하는 장벽을 제거하기 위해 민간부문 통신장비 조달에 대한 정부의 비간섭을 보장하고 통신서비스 부문의 규제 투명성 그리고 정부 차원의 개선약속 등을 요구했지만 진전이 없었다”며 한국 측에 책임을 돌렸다. 이어 “미국의 목적은 상업적 경쟁력과 기술적 우위에 입각, 최근 성장하고 있는 한국통신시장에 보다 용이한 접근이 가능하도록 한국정부와 건설적으로 협력하는데 있다”면서 “미국은 한국 측과 협상을 재개할 태세가 돼 있다”고 말했다.

 바세프스키는 “한국정부와 협정이 타결되지 않을 경우 미국정부는 미국 무역법이 허용하는 모든 대안들을 강력하게 추진할 것”이라며 압박을 가했다.

 미국의 PFC지정 대해 한국통신업체들이 가장 먼저 들고 일어섰다.

 한국통신산업협회(회장 박성규·대우통신회장)는 그해 8월 2일 미국에 PFC 지정 철회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협회는 성명서에서 “지난 5월 말까지 통신 분야 대미무역적자가 4억 달러를 넘어서 무역불균형이 심화되고 있고 6월에 허가한 신규 이동통신사업에서도 이미 미국업체가 대거 참여한 상황에서 명백한 근거도 없이 정부가 민간기업의 통신장비 구매과정에 간섭하고 있다는 주장은 심히 부당하다”면서 “억지주장을 근거로 한국을 PFC로 지정한 것을 즉시 철회하라”고 주장했다.

 통신협상 파트너인 정보통신부는 미국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다.

 정홍식 정통부 정보통신정책실장(정통부 차관, 데이콤 부회장 역임)의 증언.

 “정부는 수용불가의 근거를 정리해 미국 측에 제시했다. 미국 측 제제조치에 대한 방안도 마련했다. 맞대응조치로 관세양허 정지와 보복관세 부과, 미국 통신기업에 대한 한국시장 진입제한 조치 등도 검토했고 최악의 경우 기존 협정 폐기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주요 기간통신사업자에게 기존 장비구입처 전환과 신규 발주업체 변경 등 모든 가능한 대응조치를 사전 검토하라고 요청했다.”(한국IT정책20년사에서)

 그해 8월 8일 김영삼 대통령은 개각을 단행했다. 김 대통령은 개각에서 이석채 정통부 장관(현 KT 회장)을 청와대 장관급 경제수석으로 임명하고, 강봉균 총리행정조정실장(청와대 경제수석, 재정경제부 장관 역임, 현 민주당 국회의원)을 정통부 장관에 기용했다.(이 내용은 나중에 자세히 소개키로 한다).

 한미통신 협상 강경론자인 이 장관이 교체되자 미국 측은 기다렸다는 듯 그해 8월 26일 한국 측에 한미통신회담을 제의해 왔다. 바셰프스키 USTR대표서리는 이날 강봉균 정통부 장관에게 서신을 보내 “양국 간 현안(PFC지정)을 신속히 해결하기 위해 양측이 아무 조건 없이 협의를 하자”고 제의했다.

 한미 양국은 9월 24일과 25일 이틀간 서울 정보통신부 회의실에서 1차 통신협의회를 열었다. 한국 측에서 서영길 정보통신부 국제협력국장(정통부 우정국장, TU미디어 사장 역임, 현 IGM세계경영연구원장)이, 미국에서 션 머피 무역대표부 아·태통신담당국장이 수석 대표로 참석했다. 한국 측 대표단으로 김원식 정통부 산업지원과장(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장 역임, 현 법무법인 세종 고문)과 박효성 외무부 서기관(현 주 제네바대표부 차석대사), 최훈 재정경제원 사무관(현 기획재정부 광역두만개발계획사무국장), 주영준 통상산업부 사무관(현 지식경제부 자동차조선과장), 정현철 정통부 사무관(현 국립전파연구원 전파자원기획과장)과 자문위원으로 정인억 통신개발연원 연구위원(KISDI 부원장 역임, 현 국가정보화전략위원)과 서종흘 한국통신 자산국장(한국통신 전문위원 역임) 등이 참석했다.

 양국 간 쟁점은 크게 통신장비 조달과 통신서비스 등 2가지였다.

 미국은 장비조달과 관련, 한국 정부가 민간기업 장비 구입에 개입하지 말 것을 문서로 약속해 달라고 요구했다. 한국은 정부가 민간통신사업자의 장비구매에 개입한 사실도 없고 관여할 수도 없으며 이는 전적으로 기업에서 판단할 문제라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섰다.

 서영길 국장은 회담에 앞서 미국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자료 준비를 했다. 미 워싱턴 애킨검프 법률회사와 계약을 맺고 통상전문가인 김석한 변호사(현 시니어 파트너)를 통해 협상에 결정적 자료를 입수했다.

 서영길 국장의 증언.

 “당시 한국은 TDX와 CDMA 등이 개발에 성공해 국산화 열기가 높았습니다. 국산장비 권장정책이 미국 측에 빌미를 주었습니다. 정부가 민간기업 장비구매에 개입했다는 것입니다. PCS사업권 신청서류에 네트워크 구성계획에 교환기는 어느 회사 어떤 모델을 사용하겠다는 항목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자료를 미국 측이 입수해 ‘정부가 민간사업자에 국산품을 사용하도록 압력을 넣는 증거’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무렵, 데이콤이 외산 컴퓨터를 도입하기 위해 계약까지 했는데 해약하고 주전산기를 도입한 일도 있었습니다.”

 서 국장은 정현철 사무관과 밤늦도록 대책을 마련하다 문득 미국에도 그런 사례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 국장은 미국에 있는 김석한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미국 정부의 네트워크 제출서류에 제품 모델까지 명기하는 항목이 있는지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로부터 일주일후 김 변호사는 수천종에 달하는 미국 FCC(연방통신위원회)의 서류 양식을 조사해 그중에서 3개를 찾아냈다. 무선국 장비를 교체할 때 장비 모델번호를 기록해 승인을 받거나 신고하는 서류였다. 서 국장은 이 서류 복사본을 넘겨받아 회의에서 반박 자료로 활용키로 했다.

 서 국장은 회의 첫 날인 24일 첫 발언에서 두 가지를 미국 측에 제안했다. 첫째, 미국 제도를 한국이 시행하면 미국 측이 양해할 것, 둘째, 다자간 협상과 겹치는 사항은 다자간 협상에서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미국 측 머피 대표는 첫째 제안은 흔쾌히 수용하겠다면서 둘째 제안은 추가 검토하겠다는 긍정적인 자세를 보였다.

 서 국장의 계속된 말.

 “쉬었다가 회의가 재개되자 미국에서 입수한 서류를 제시하면서 ‘미국도 모델번호를 적고 있다. 한국이 교환기 모델을 명기한 것은 미국과 같은 것 아니냐’고 했어요. 허를 찌린 미국 측 FCC 관계자가 서류를 확인해 보더니 ‘맞다’고 하더군요. 미국 측은 이 점에 대해서는 문제를 삼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그러면서도 PFC해제 요건이 협정체결이라며 서면합의를 요구했다. 한국은 절대 협정체결은 안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다만 정부가 정책을 발표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는 신축적인 입장을 전달했다.

 그해 10월 2일 미국을 방문 중인 한승수 부총리 겸 재경원 장관(국무총리 역임)은 샬린 바셰프스키 USTR 대표서리와 만나 “지난 7월 미국이 한국을 통신 분야 PFC로 지정한데 대해 이 조치가 양국 간 통상관계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한미 양국은 10월 30일과 11월 1일 이틀간 워싱턴의 USTR 회의실에서 2차 통신협의회를 개최했다. 한국에서 서영길 정통부 국제협력국장이, 미국 측에서는 션 머피 무역대표부 아·태통신담당국장이 수석대표로 각각 참석했다. 워싱턴회의에는 주미한국대사관 한춘구 통신협력관(정통부 정보통신지원국장, 한국전파기지국 대표역임, 현 고문)이 참석했다.

 한국 측은 민간기업 자율구매 원칙을 천명하는 수준의 정책발표안을 공식 제안했다. 미국 측은 이에 대해 정책발표안은 형식이나 내용에서 불충분하다며 정부 간 협정체결을 거듭 주장했다. 한국은 민간업체의 장비구매에 정부가 간섭하지 않고 있다면서 이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했다. 회의는 마치 물레방아가 돌 듯 동의어만 반복하다 끝냈다.

 정부는 그해 11월 19일 오전 한승수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 주재로 박재윤 통상산업부 장관(부산대학교 총장 역임), 강봉균 정보통신부 장관, 이석채 경제수석비서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관계장관회의를 열고 통신 분야와 통상현안에 대해 논의했다.

 한미 양국은 그해 12월 18일과 19일 이틀간 미 워싱턴 DC USTR회의실에서 3차 통신협의회를 열었다. 한국에서 서영길 정보통신협력국장이 미국 측에서 션 머피 USTR아·태통신담당국장이 각각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한미 양국은 지루한 줄다리기 끝에 “국내 민간통신사업자의 통신장비구매에 정부가 개입하지 않겠다는 협정을 체결하자”는 미국 요구 대신 “민간통신사업자는 독자적으로 외국통신장비 구입을 결정할 수 있다는 WTO(세계무역기구)협정 원칙을 정통부 회보에 발표문으로 게재하자”는 한국 측 주장을 수용하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서 국장의 말.

 “문서로 약속할 경우 매년 이행사항을 점검해야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문서로 약속할 수 없다는 게 한국 입장이었습니다.”

 3차 회담 첫날인 12월 18일 오전 한국 대표단은 전자신문 보도로 인해 한바탕 곤혹을 치렀다. 한미통신회담을 시작하자 미국 측 머피 수석대표는 서 국장 앞으로 전자신문 12월 17일자 기사를 내밀었다. ‘외산 PCS장비 구매추진 물의’라는 제목아래 한통프리텔과 한솔PCS가 국산자용 계획서 내용을 번복했다는 기사였다. 원문과 번역문을 동시에 내밀면서 미국은 “이런데도 한국 정부가 민간기업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느냐”며 꺼진 불을 다시 지피려 했다. 서 국장은 기사를 읽어보고 난감했다. 하지만 그는 정통부 공보관을 지내 언론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고 있었다. 서 국장은 “언론보도는 기업 간 일로 정부는 이 일에 절대 관여한 적이 없다”고 미측을 설득해 사태를 무마했다.

 한미 양국은 정책발표문이라는 큰 원칙에는 합의했으나 내용과 수준 등에 이견을 해소하지 못해 최종 타결은 이듬해로 넘겼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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