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 유명한 햄릿의 독백이다. 미래 기술에도 이런 독백 대입이 가능하다.
“추진이냐, 중단이냐” 찰나의 선택이 나중에 기업이나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마스터 키가 될 수 있다.
CDMA.
한국의 ICT사(史)에서 퀀텀점프를 하게 만든 3대 핵심기술이지만 세계 최초 상용화까지는 고비가 많았다. 당시 CDMA 기술을 도입하고 국책사업으로 상용화를 추진한 것은 탁월한 정책 결정이었다. CDMA 상용화는 한국식 미래기술 개발 모델이었다.
CDMA 단일표준화까지는 찬반양론이 날카롭게 대립했다. 정치권의 문제 제기와 기업 간 이해갈등이 첨예하게 맞섰다. 미국 측의 무역압력까지 극복해야 했다. 그 후에도 고비는 파도처럼 다시 몰려왔다. 이런 고비를 넘기고 CDMA는 신화창조의 주역이 됐다.
이석채 정통부 장관이 취임하자 당시 업계에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돌았다.
소문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경복고 인맥으로 김 대통령의 차남 현철(현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씨와 가까운 이 장관이 청와대에서 CDMA 단일화를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현철씨와 친분이 있는 이웅렬 코오롱 그룹 부회장이 신세기통신 2대주주인 점을 이용해 칼라 힐스와 호흡을 맞춰 TDMA 방식 허용을 정부에 강력히 요구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장관은 청와대에서 “CDMA를 고집하지 말라”는 오더(지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당시에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다. 그런데도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 옛 속담처럼, 도화지에 뿌린 물감처럼 확 퍼졌다.
양승택 전 정통부 장관(한국전자통신연구소장, 동명대 총장 역임, 현 SK텔레콤 고문)은 그의 회고록 ‘끝없는 일신(日新)’에서 이렇게 밝혔다.
“경상현 장관은 CDMA를 PCS 표준으로 공표한 것으로 인해 경질되고 이석채 장관이 부임했다. 이 장관이 청와대로부터 받은 임무는 CDMA를 죽이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경 장관이 정한 800㎒대의 이동통신 표준이 이미 CDMA로 결정된 뒤의 결정인데 청와대의 사태파악이 얼마나 현실을 모르는 것인지 이로써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장관은 곧바로 CDMA 해법 찾기에 나섰다. 청와대의 오더가 있었으니 단시간 내 상황을 파악해 결론을 내는 것이 최상의 방안이었다. 그는 일을 미루거나 피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이 장관은 각계 전문가 등 10여명을 만나 이들의 의견을 들었다.
그 무렵, 한국통신학회장으로 이 장관에게 CDMA 개발을 적극 주장했던 박한규 연세대 교수(현 연세대 명예교수)의 기억.
“1월 3일 신년 인사차 이 장관을 회장단과 같이 정통부로 방문했어요. 당초 면담시간이 5분간이었으나 FPLMTS(Future Public Land Mobile Telecommunication System)와 CDMA 개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1시간 40분으로 늘어났습니다. 점심도 건너뛰었어요. 저는 CDMA 상용화를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기술성이나 경제성 면에서 우수해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장관께서는 주로 듣기만 했습니다. 주요 내용을 일일이 메모하시더군요. 그 후에도 10여명의 소장학자들과 같이 이 장관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CDMA 기술에 대한 지식이나 연구경험이 없는 이 장관은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상황에 대한 이 장관의 설명.
“각계 인사를 만나 대화를 나눴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CDMA 개발은 당시로선 불확실성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런데 해법의 아이디어를 칼라 힐스가 한승수 청와대비서실장(국무총리 역임, 현 김앤장 고문)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찾았습니다. 칼라 힐스는 편지에서 한국이 명백히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봐주기 위한 조치라고 주장했어요. 신세기통신에 대한 정부조치가 불공정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문득 칼라 힐스의 요구를 허용했을 때와 CDMA를 그대로 추진했을 때의 경우가 생각난 것입니다.”
이 장관은 두 가지에 대해 기술적 판단보다는 모든 경우의 상황을 설정하고 가설을 세우는 리스크관리 접근법을 적용했다. 여기에 정치적 논리를 가미했다.
이 장관의 계속된 증언.
“리스크관리 접근법을 적용했습니다. 만약 CDMA 상용화 실패가 두려워 이를 포기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정통부가 그런 식으로 정책을 변경하는 순간 사방에서 문제를 제기할 것입니다. 처음 CDMA 기술을 도입한 사람들과 상용화를 확신하는 연구진, 정치인, 그리고 다수 침묵자들이 온통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은 정통부를 건너뛰어 청와대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건 명약관화합니다. 정부가 1000억여원을 투입했고, 국책사업으로 세계 최초 상용화를 추진 중인 CDMA 사업을 중도에 포기하는 일은 어떤 이유에서건 용납할 수 없다고 공격하면 정통부 장관이 그만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대통령과 정권차원의 문제로 비화할 것입니다.”
그 반대 경우에 대한 이 장관의 말.
“현행대로 CDMA 상용화를 추진하는 경우입니다. 만의 하나 상용화에 실패했다고 가정합시다. 미국이 문제를 제기하면 청와대는 정책실패 책임을 정통부 장관에게 물으면 될 일입니다. 결론은 명료했습니다. 최상의 수(手)는 상용화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문제는 구름 걷히듯 해소될 것입니다. 상용화에 실패한다고 해도 실패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국내 연구진이 축적한 첨단기술력이 있고 계속 개발하다 보면 다소 늦긴 해도 상용화에 성공할 것입니다. 결론은 CMDA 상용화는 그대로 추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공하면 대통령과 정권의 업적이고 실패하면 정통부 장관이 책임지면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결론을 내린 이 장관은 망설이지 않았다.
곧장 청와대 비서실에 대통령과 독대를 신청했다.
1월 중순 어느 날.
이 장관은 청와대 본관 2층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섰다. 대통령 집무실은 교실만큼 넓었다.
이 장관의 기억.
“김 대통령이 저만큼 떨어져 혼자 앉아 계셨습니다. 그래서 ‘각하 가까이 가서 보고드리겠습니다’ 하고 책상 앞으로 다가갔어요.”
그는 CDMA 문제에 관해 자신이 내린 결론을 김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각하, 걱정하시는 CDMA 문제를 검토한 결과 현행대로 추진하는 게 옳다고 판단합니다.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CDMA 상용화를 추진하는 것입니다. CDMA가 성공하면 이는 세계 최초입니다. 이 일은 각하와 문민정부의 큰 업적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신세기통신과 미국 측의 요구대로 TDMA를 복수로 허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그동안 1000억원을 투입해 개발해 온 CDMA는 사장(死藏)될 수 있습니다. CDMA를 포기하면 정통부 장관이 사표를 낸다고 해결될 사안이 아닙니다. 정권 차원의 문제로 비화해 각하에게 화가 미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CDMA는 현행대로 추진하는 게 좋겠습니다. 실패하면 장관인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이 장관의 보고를 듣던 김 대통령이 잠시 생각하다가 그 자리에서 결론을 내렸다.
“좋소, 이 장관 소신대로 하시오. 대신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요.”
대통령의 그 말 한마디로 CDMA를 고집하지 말라는 청와대의 오더가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한국의 CDMA가 세계 ICT 역사를 새로 쓰게 하는 마지막 고비를 넘는 순간이었다.
만약 이 장관이 이런 논리로 김 대통령을 설득해 결심을 얻지 못했다면 한국은 ICT 강국의 기치를 내걸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CDMA 상용화는 한국 이동통신산업의 획기적인 도약을 가져왔다. 한국은 그 여세를 몰아 IT 강국의 반열에 올랐고 ICT사에 또 한 번의 퀀텀점프를 기록한 것이다.
숨 막히는 이런 정책반전이 있었는지를 당시 정통부 실무진은 전혀 몰랐다. 워낙 민감한 사안이어서 이 장관이 홀로 ‘외로운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정통부 전직 고위관계자의 증언.
“그 당시 상황에서 이 장관이 기존 CDMA 정책을 뒤집기란 거의 불가능했어요. 이미 정통부가 CDMA를 PCS 접속방식의 단일표준으로 결정했고 정부가 국책사업으로 몇 년간 1000억원을 투입해 상용화를 추진 중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쉽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런 현실을 파악한 이 장관이 특유의 논리로 김 대통령을 설득했다고 봅니다. 여기에 정홍식 정보통신정책실장(정통부 차관, LG데이콤 부회장 역임)이 중간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청와대에서 10년간 ICT정책을 다뤄 정책결정의 메커니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복수표준을 선택할 경우 이미 개발한 CDMA 기술마저도 사장될 수 있다고 말했을 겁니다.”
김창곤 정통부 기술심의관(정통부 차관 역임, 현 LG유플러스 고문)의 회고.
“그 당시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정통부가 CDMA를 단일표준으로 확정한 상태여서 그대로 가는 줄 알고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그런데 이 장관이 물러나고 몇 년이 지난 후 어느 사석(私席)에서 이 장관이 그런 말씀을 하는 걸 들었어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6년간 CDMA 개술개발과 상용화 실무를 담당했던 신용섭 정통부 연구개발과장(현 방송통신위원회 융합정책실장)의 말.
“그런 낌새조차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는 CDMA 상용화가 가장 시급했습니다. 다만 이 장관께서 ‘왜 CDMA를 단일표준으로 해야 하느냐’ ‘자동차 부품도 시제품이 나온 뒤 표준을 삼는데 왜 시제품도 나오지 않았는데 표준으로 했느냐’는 등의 질문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CDMA 단일화를 저지하라는 청와대의 지시를 받은 이 장관이 오히려 CDMA를 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셈이었다. 그런 정책 결정이 CDMA 세계 최초 상용화라는 화려한 금자탑을 쌓게 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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