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객원논설위원·광운대 정보콘텐츠대학원장(kshkbh@kw.ac.kr)
“사람이 곧 방송이다.” 이 메시지는 내가 몇 년 전에 한국방송 역사상 크게 존경받던 한 선인(先人)의 평전(評傳)을 내면서 붙인 부제(副題)이다. 그 분은 우리나라 아나운서계의 선지자이자 정신적인 지주였던 선비 방송인 장기범(張基範ㆍ1927-1988)이다. 1950, 60년대 한국방송의 표상이었던 그는 늘 ‘사람이 된 사람이 방송을 해야 한다’고 갈파했다. 장기범은 1968년 8월 한 방송전문지와의 인터뷰에서 방송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깊은 인간 수양이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부단히 정진하고 노력하는 인간, 전체 인격을 구비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그의 신념이었고, 그는 늘 이 신념을 견지하며 방송인의 길을 걸었다고 고백한 적도 있다.
지금 우리 방송계가 퍽 어지러운 지경(地境)인 듯하다. 방송시장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채널에, 엄청난 방송 종사자들로 즐비하다. 그런데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인격도야를, 어떤 교육과정을, 어떤 실전수련을 거쳐 어떤 생각과 신념으로 방송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이들 가운데는 정치방송인도, 정신분열자도, 사기전과자도, 음주운전자도, 자기중심적 이기주의 고착증 환자도 끼여 있는 듯하다. 그러나 더 큰 방송 부적격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를 방기하면서 명예를 취하며 고액을 수령해 가는 방송인들이다. 이들이 받아가는 대가는 그것이 광고료든 수신료든 모두다 서민들의 땀과 눈물이다.
그렇다. 권력과 자본에 초연했던 장기범은 서민이기를 자처했고, 스스로 영원한 서민일지도 모르겠다고 글을 쓴 적도 있다. 대한민국 최고의 아나운서로, 어린이 시간의 ‘무엇일까요?’에서 ‘스무고개’ ‘노래자랑’ ‘스타탄생’ ‘재치문답’에 이르기까지 첫 사회를 맡아 선구자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장기범은 ‘말보다 마음’, ‘사람이 된 사람’이 방송을 해야 한다고 믿고 몸소 실천했다. 그는 인기 MC로서 명소에 초대를 받아도, 보도 최고 책임자가 돼 친구 국회의원이 청탁을 해도, 그가 일관되게 한 말은 ‘그럴 수는 없다’였다.
“장기범 평전 -사람이 곧 방송이다”라는 내 원고를 넘겨받은 지식산업사 김경희 사장은 이를 일독하고, 선뜻 자사의 기획시리즈 ‘역사 속의 인간 탐구’ 28번째 인물로 장기범을 선택했다. 그러나 나는 기본 부수도 못 미치는 책을 낸 죄 값을 아직 출판사에 갚지 못했다. 이제 더는 손뿐 아니라 발품까지 팔아야 하는 이러한 평전은 정말 못낼 것 같다.
한 해를 마감하는 이 연말에, 한국방송계를 돌아보면서 고매한 인품에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올곧게 살다간 방송선인을 기억하며, 오늘의 방송인들이 표상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전 국회의원 이계진(李季振)이 지은 장기범 묘비명에도 있듯이 그는 ‘난세를 학처럼 사셨지만, 위대한 상식인’이기도 했다. 매년 이맘 때 쯤이면 이계진이 기부한 상금으로 한국방송아나운서연합회가 개최하는 ‘장기범상’ 시상식이 열리곤 한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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