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관리 30년]<2>에너지 관리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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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1회 열관리대회 모습. 에너지 절약 의식을 고취하고 각계 에너지 유공자를 포상해 오늘날의 에너지절약촉진대회로 발전했다.

한국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나기 위한 1960, 1970년대 정부의 가장 시급한 목표이자 국민의 여망은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이 같은 절대목표를 위해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계획은 필연적으로 에너지 소비 증가를 수반했다. 에너지는 산업 생산에 꼭 필요한 투입 요소였고, 에너지의 안정적인 공급은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 추진에 없어서는 안 될 동력이었다.

1970년대 공업화와 경제성장은 뚜렷한 에너지 소비 증가로 이어졌다. 국민 1인당 에너지 소비는 1970년 0.61석유환산톤(toe)에서 1980년 1.15toe로 배 가까이 늘었다.

우리나라 에너지 소비가 본격 증가하기 전부터 중동 산유국들은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결성해 민족주의를 강화했다. 급기야 1973년 10월 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면서 우리나라는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1차 석유파동에 휘말려들 수밖에 없었다. 국제원유 가격은 3배 이상 급등했고, 에너지 소비가 갑작스럽게 늘기 시작한 우리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화급해진 정부는 1973년 11월 `원유감량공급에 따른 정책`을 수립하는 한편, `에너지소비절약추진위원회`를 설치해 국민적 에너지절약 운동을 전개하고 나섰다. 관제 성격이 강하긴 했지만, 그 가운데 대표적인 행사가 1974년 제정된 `열관리법`에 따라 시행된 열관리대회다. 1977년부터는 `에너지 10% 절약운동`도 강력히 추진됐다.

전 세계는 1차 석유파동 충격에서 서서히 빠져나올 즈음, 이란혁명이 터져 2차 석유파동에 빨려들었다. 1978년 10월 회교혁명으로 새로 들어선 이란 회교정부는 그해 12월에 원유 수출을 전면 중단했다.

우리나라의 원유 도입량은 1979년에 1억8600만배럴을 정점으로 감소 추세를 보였다. 그러나 2차 석유파동으로 배럴당 원유 도입단가가 1979년 17.96달러에서 1981년 35.58달러로 배가 뛰면서 석유수입 대금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는 1980년에 우리 경제개발 사상 최초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는 직접적 원인이 되기도 했다. 대외 의존도가 높아진 우리 경제도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에너지 같은 산업 생산 원료의 외적 불안 탓에 사회적 연계 불안 요인도 매우 높아져 국가적 가격안정 장치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졌다.

손학식 에너지관리공단 에너지관리본부장은 “이때부터 전력 · 석유 가격은 정부의 물가 통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됐고, 정부는 공공요금의 인상을 억제함으로써 물가 불안을 잠재우는 정책을 추진하게 됐다”며 “그러나 이 같은 에너지 가격의 직접 통제는 물가의 변동을 줄이는 방향이어서 에너지 가격의 상승 요인이 발생하더라도 인상이 억제됨으로써 국민들의 에너지 소비에 대한 비용 인식을 왜곡하는 부작용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1 · 2차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우리나라도 에너지 관리를 위한 전담기관 설립과 운영의 필요성이 명확해졌다.

이진호기자 jho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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