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기 · 전자, IT산업 분야의 국제표준을 논의하는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 총회가 10월 중순 미국 시애틀에서 열렸다. 80여 개국에서 2500명의 전문가가 참석한 대규모 국제회의로서 국제표준에 각국의 기술을 반영하기 위한 분위기는 마치 전쟁터와 같았다.
총회 당일 IEC 사무총장인 아론 아미트가 단상에 올라 “금년도 국제표준 제안 1위는 대한민국, 축하합니다. 이어서 2위 중국, 3위 미국, 4위 일본, 5위 독일”이라고 발표하자 일본과 독일대표단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선진국이 주도하던 국제표준의 역학구조가 깨지는 소리였다. 우리나라 대표단 160여명을 이끌고 대표단장으로 참석한 필자에게는 정말 짜릿한 순간이었다. 국제표준을 주도한다는 것은 표준을 통한 세계시장 선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1999년 국제표준화 무대에 뛰어든 이후 2002년 처음으로 국제표준을 제안하고 10년이 채 못 돼 정상에 오른 것에 대해 162개 회원국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동안 전략적으로 대응한 정부의 노력도 있었지만 학계, 연구소, 그리고 기업의 전문가들이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국제표준화 활동에 적극 참가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헌신하고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필자는 국가 차원의 정책에 힘입어 지난해보다 두 배 이상의 국제표준을 제안하면서 4등에서 2등으로 도약한 중국 생각에 시애틀에서의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중국보다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국제표준화 정책을 추진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다음 세 가지가 빨리 이루어지길 밤새 빌었다.
첫째, 국제표준화에 참여하고 있는 산학연 전문가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정부 차원에서 마련하는 것이다. 변변치 못한 정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국가이익을 위하여 기술위원회(Technical Committee) 등에서 자발적으로 활동하는 전문가들이야 말로 숨은 애국자요, 진정한 외교관이다.
둘째, 정부의 중대형 R&D 사업에서 평가요소의 핵심 지표로서 표준화 실적이 반영돼야 한다. 특허와 SCI급 논문도 중요하겠지만 지구촌 모두가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국제표준으로 등록된 기술이야 말로 개인의 이익이 아닌 국가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국제표준화 활동에 기업 참여가 시급하다. 우리나라의 국제표준화에 대한 기업 참여는 참여 전문가의 10%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지멘스, 소니 등 독일이나 일본 기업들은 국제표준화 활동 참여에 적극적이다. 이들의 참여는 자사 기술의 국제표준 반영이나 최신기술의 정보습득 등이 목적이지만, 한편으로 국제사회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숨어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이번 IEC 총회의 스폰서로서 미국, 독일, 일본 등의 60여개 기업과 기관들이 참여했는데, 세계 제일의 전자산업, IT 강국임을 자임하는 한국 기업은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웠다.
시애틀은 마이크로소프트, 스타벅스, 코스트코, 아마존닷컴, 유피에스 등 세계시장을 리드하는 글로벌 기업의 본사가 있는 땅이다. 그들은 표준화를 통해 시장경쟁력을 높인 기업으로도 유명하다. 표준화로 성공한 기업이 즐비한 시애틀에서 그날 저녁 대표단 몇 사람과 함께 우리의 국제표준화 전략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고민은 밤을 지새고 난 다음날 아침, 서비스와 품질을 표준화하여 세계를 제패한 스타벅스 1호점의 커피를 음미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최형기 기술표준원 기술표준정책국장 hyeongki@kats.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