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우리나라의 컴퓨터그래픽(CG) 기술은 왜 미국영화처럼 멋지지 않죠?’라는 질문을 받는다. ‘제작비 규모가 다르니까요’라는 뻔한 대답을 듣고 싶지는 않겠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CG산업을 발전시킬 ‘충분한 기회와 과정’이 없었다. 모든 기술은 실험을 거쳐서 개발되고 정교해진다. 그리고 실험의 종착역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성공이다. 그러므로 실험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실패의 연속극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의 CG가 발전하려면 더 많은 작품과 실험이 시도돼야 한다. 다행히 한국영화에서도 CG로 승부를 건 영화가 등장하고 있다. 한강에 나타난 ‘괴물’ ‘해운대’를 덮치는 거대한 쓰나미에서 CG가 흥행성공의 일등공신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특정분야의 전유물이던 CG는 이제 거의 모든 한국영화에 적용되고 있다. 눈속임 기술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을 영화조차 엔딩 크레디트에 CG회사가 올라가면, 나 역시 다른 관객처럼 궁금해진다. “대체 CG가 어디 들어간 거죠?”
최근의 미국영화를 보면, 배경설정이 현실을 뛰어넘는 작품이 넘쳐난다. 과거나 미래, 우주를 떠도는 건 기본이고 신화와 판타지의 세계를 마치 진짜 있음직한 풍경처럼 천연덕스럽게 재현해 낸다. 상상하는 대로 완벽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관객은 점차 CG로 구현된 장면에 이미 친숙해졌다. 초등학교 시절 문방구 앞에 쪼그려 앉아 ‘갤러그’의 버튼을 필사적으로 눌러대던 세대가 있었다. 그때 그 화면을 우주선의 침공으로 받아들인 ‘순진한 어린이’들은 이제 어른이 됐고 이들의 자식세대들은 영화가 더 놀라운 것을 보여주기를 바랄 것이다. 하긴 자동차가 로봇으로 변신하는 세상이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오로지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상상력을 위해서만 CG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창작분야에서 기술력을 축적한 CG는 우리 생활 전반(기초과학, 교육, 건축, 의학, 교통, 기상 등)에 걸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정부가 미래 한국을 위해 이 놀라운 신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판단한 건 올바른 생각이었다. ‘디지털강국’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대학마다 영화학과, 애니메이션학과, 방송학과뿐만 아니라 ‘Digital’을 접두사로 붙인 여러 학과를 양산했다. 한국의 꿈 많은 청년들이 열심히 대학을 다녔고, 유학을 마쳤다. 그런데 아쉽게도 지금 그들에겐 일할 기회가 없다. 업계와 세계경제 불황이 맞물리면서 국내 영화산업은 하향곡선을 그렸고, 더불어 CG를 만드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부나 유관단체가 벼랑 끝에 선 이 분야를 살리기 위해 지원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지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업계가 성공작을 만들어 스스로 살아나야 한다. 다만 ‘시장에서의 성공’을 서둘러 기대하지 않기 바란다. 어느 분야든 ‘기술개발’은 실패의 계단을 딛고 올라간 무수한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고, 우리는 그것을 ‘과정’이라 부른다. 성공은 그 계단 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1977년에 기념비적인 SF영화 ‘스타워즈’가 공전의 흥행기록을 세웠다. 같은 해에 할리우드의 또 다른 최고흥행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미지와의 조우’라는 영화로 대단한 실패를 기록한 걸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컴퓨터그래픽 역사에서 두 작품의 업적과 이름은 나란히 거론된다. 둘 다 반드시 필요한 시도였기 때문이다. 실패에 투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실패와 좌절을 겪지 않은 현재란 없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한국영화와 CG, 그리고 우리 젊은이들의 미래가 달려 있지 않은가. 우리는 조금 더 용감해져야 한다.
김성수 영화감독/zenky6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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