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이와 달래, 초고추장에 갓 오른 두릅 그리고 구수한 된장국까지 ‘봄의 왈츠’가 들리는 듯했다. 산전수전 다 겪었을 이력이지만 CEO라기보다는 마음씨 고운 학자 같은 풍모다. 여느 대표이사 집무실은 큼직한 평수와 가구의 중후함이 상징이지만 집무실은 오히려 소박하기 그지없다.
도상철 농수산홈쇼핑 대표이사 사장(63). 그가 그랬다. 설렘의 구수한 냄새가 난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밤, 달빛 아래에서 툭툭 꽃망울 터지는 소리에 가슴 벅찬 느낌이었다.
그는 먹거리에 대한 세상 인심이 야박한 요즘, 국산 한우와 쌀, 콩, 된장을 단원으로 구성해 오케스트라를 꾸렸다. 관중(소비자)이 단원들의 소리(맛)를 어떻게 평가할지는 아직 모른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하모니를 위해 찰지기로 소문난 해남 고구마를 특별손님으로 초대했다.
관중의 호응은 바라지 않지만 기왕에 순수 국산으로 ‘봄의 왈츠’를 무대에 올렸으니 감상은 고객이 직접 느껴보란다.
아직 끝나지 않은 오케스트라 지휘봉이 그의 손에 놓여져 있어서일까. 약속 시간보다 10분 정도 늦게 그와의 만남이 이뤄졌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을 먼저 배워라
학자풍 같은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지만 찬찬히 뜯어 보면 날카로움이 묻어난다. 때로는 옆집 아저씨 같은 스타일에 약간은 짓궂은 듯한 눈매, 듣는 이를 빨아들이는 말솜씨 등.
그의 이력은 화려하지 않지만 ‘알곡의 경력’을 갖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고 육군종합학교에서 참모학을 가르쳤다. 인사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인사행정에서는 마당발이다. 이후 마흔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제일사료 총무부 차장으로 입사했다.
“처음에는 직원들이 군에서 교수를 했다는 말을 듣고 다가오기를 꺼리더군요. 10년을 낮추고 먼저 다가가니 직원들과 친해졌습니다.”
제일사료에는 간부교육이 없어 신입사원 교육을 받았다. 2층에서 내려오는 사료 한 포대 25㎏을 받아 차에 싣는 업무를 한 달 동안 했다. 솔선하는 모습이 믿음으로 비치면서 동료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1년 뒤 부장에 오르면서 군에서 배운 인사행정을 회사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먼저 손을 댄 곳은 직원식당이다. 점심시간에 현장사원은 플라스틱 식판에, 사무직은 알루미늄 식판에, 차장급은 계란 후라이를 얹은 식단이 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군대보다 못한 공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식판을 알루미늄으로 바꾸고 임원들이 입장하는 뒷문을 폐쇄했고 식당을 줄서기로 바꿨습니다. 처음에는 임원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지만 점차 회사 분위기가 좋아지면서 1987년 대전 2공단이 파업에 들어갔을 때 우리 인천공장만은 파업을 안 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모두가 공평한 인사행정을 펼친 결과다.
환갑이 넘어서도 그는 향학열에 불을 지핀다. 생산성본부, 능률협회 등에서 ‘열공’ 중이다. 식스시그마 등 학문적인 것은 그냥 공부만 하고 이를 현장에 적용하기 위한 되새김질에 지금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단순함을 추구하라
그를 만나기 전 벽에 걸린 ‘단순함을 추구하라’는 사훈이 눈에 들어왔다. 농수산홈쇼핑은 2001년 홈쇼핑TV 시장에 합류하면서 국내 홈쇼핑방송 가운데 유일하게 먹거리를 전문 테마로 삼아 국민의 식탁을 윤택하게 만들고 있다.
경영에 관련된 모든 업무의 의사결정은 신속하게 진행하고 있다. 정보화시대에 정보는 허우적거릴 정도로 넘쳐나고 스스로 번식해 정보를 관리하는 인간의 능력을 제압하고 있는 상황이다.
“농민은 농산물을 잘 팔지 못합니다. 친환경농법으로 생산한 쌀을 1년 365일, 24시간 언제든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ARS 쌀 판매에 나서고 있으며 방송비용이 많이 지출되는 된장, 고추장도 진행하고 있지요. 앞으로는 김치까지 할 계획입니다.”
단순한 경영이 아니라 단순화된 경영을 추구하고자 하는 도 사장의 의지가 묻어나는 대목이다.
취급 상품의 60% 정도가 식품으로 구성된 농수산홈쇼핑을 이끄는 그에게 요즘만큼 고민스러운 적이 없다. 조류인플루엔자(AI), 광우병, 서해안 기름유출 등으로 먹거리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바른 먹거리를 위한 그의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는 전국을 다니면서 시스템적으로 원료 입고에서 제조까지 생산시설과 직원 교육, 위생 등에 관한 모든 사항을 직접 점검한다. 예를 들어 사과박스를 공급받을 때 박스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박스를 오픈하고 내용물을 일일이 확인하는 꼼꼼함을 실천하고 있다. 화장실을 갔다오면 손은 닦았는지, 화장실용 신발은 신었는지, 환경 모자를 썼는지 지속적인 교육을 하고 있다. 이로 인해 농수산홈쇼핑은 업계 최저 수준의 클레임 및 반품률을 자랑한다.
“고객을 진정 가슴으로 섬기는 유통기업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담아 기업이념을 ‘고품격 생활문화 창조’로 정했습니다. 고객들에게 고품격 상품·쇼핑·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것이지요.”
단순히 구호로 그치는 고품격 상품이 아니라 철저한 현장 중심, 고객 중심 서비스를 실천하겠다는 강한 신념이기도 하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
인사행정을 전공한 치밀한 성격답게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용병술도 눈길을 끈다.
농수산홈쇼핑이 운영하는 오프라인 형태의 ‘700마켓’은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생활필수품을 중심으로 700개 정도의 상품만 취급하고 있다. 팔리는 것에만 집중한다는 판매전략이다. 가격할인을 회사 정책 결정 때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았다. 상품 가격에 전가되는 비용 요소를 최소화함으로써 발생하는 이익을 가격할인 형태로 고객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매장의 손익 분기점 정도의 이익만 붙여서 팔기 때문에 제조사에 납품가 인하 압력을 넣을 일이 전혀 없다.
“매장에는 직원 5명만 상주하고 박스 안에서 고객들이 직접 제품을 가져가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가격이 싸다고 소문이 나면서 경쟁 유통업체의 견제를 받기도 합니다.”
자체(PB)상품도 할 생각이 없다. 일본과 같이 제조사들이 판매 걱정은 안 하고 오로지 생산만 하는 유통구조여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상생경영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생산자에게 부담을 주기 때문이란다.
해외사업 진출과 관련해서도 그의 의지는 확고하다.
“얼마 전 두바이 바이어들이 본사로 찾아와서 사업과 관련된 협상을 벌였습니다. 아랍 사람들은 닭고기를 즐겨 먹기 때문입니다. 닭을 수출하며 홈쇼핑 진출을 검토하고 있지만 두바이 지역뿐만 아니라 아랍권 전역에 걸쳐 사업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아직은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조심해서 나쁠 게 없다는 뜻이다.
#농업을 3차 산업으로…
“농가 보호와 농촌경제의 경쟁력 제고가 농수산홈쇼핑의 존재가치입니다. 이를 위해 농촌 생산자들도 좀 더 원칙에 충실한 고품질의 제품을 생산해 내야 합니다.”
그는 CEO로서 꼭 해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묻자 농촌을 3차 서비스 산업으로 만들기 위해 농촌 계몽운동을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단순히 제품을 주문받아 생산해 내는 1차 산업이 아닌 변화의 주역으로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생산자는 유기농과 같은 부가가치 높은 제품 공급을 통해 농가 수익을 높이고 농수산홈쇼핑은 t커머스, 모바일 등 IT를 이용한 판매 수행으로 상생경영에 앞장서겠다는 것이다.
그는 의지와 열정을 가지고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농민이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끊임없는 상상력으로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고 판로 개척에도 적극적인 영농인이 많아 농촌은 아직 희망을 품게 한다는 것이다.
“제 삶의 철학은 끌고 가는 게 끌려가는 것보다 편하다는 것입니다. 항상 준비하는 사람이 기회를 얻고 남보다 성공궤도에 먼저 오르기 때문이지요. 이 원칙은 남녀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향의 김치 맛은 확실히 깊다. 김치가 맛이 없으면 그해 겨울 식탁도 맛이 없다.
다시는 오지 않을 올해 봄의 끝자락. 깊은 맛 내는 어머니 손과 같이 봄의 왈츠를 지휘하는 그의 손끝이 깊은 맛을 내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일 게다. 잎이 진 자리 푸름이 돋아나듯이.
■도상철 사장은
1946년생으로 서울 영등포가 고향이다. 육군종합학교 교수부 출신으로 1985년 제일사료에 입사해 인천공장장과 경영지원 담당 임원 등을 역임했다. 인천공장장으로 근무할 때 효율적인 인사행정을 위해 현장 사원의 시급제를 월급제로 바꾸는 등 노사화합을 이끌어 대통령상을 받았다. 이후 2002년 11월 농수산홈쇼핑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경영·서비스 담당 상무이사 등을 맡아왔다. 군 소령으로 예편해 겸손함이 몸에 배어 있다. 후배들에게는 끌려가기보다는 끌고 가기를 주문한다. 친구 같은 아내와 자신을 쏙 빼닮은 두 딸, 그리고 아들이 무척 자랑스럽다. 인생에서 얻은 게 있다면 낮추고 먼저 다가가라는 것이다. 사람이 곧 신뢰다.
김동석기자 ds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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