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베이징에서 답을 구하다

 우유라도 사기 위해 현관문을 나서는데 찬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듭니다. 벌판 위에 세워진 도시라 원래 날카롭긴 하나 오늘따라 북풍은 골목길에서 칼춤을 춥니다. 이곳 베이징 날씨는 서울보다 하루 이르다 하니 내일 아침 둘째 딸 등교길이 무척 추울 듯하여 걱정입니다.

 마실가듯 이국을 오가는 생활 1년여 만에 혼자 지내는 일요일. 사무실이 부실 인테리어로 재공사에 들어가는 바람에 오늘은 재택근무입니다. 쇼핑센터를 제외하고 대부분 업무용 빌딩과 거리상점은 문닫았습니다. 지역 중심가도 곳곳의 신축공사장 망치와 드릴 소리가 메아리칠 뿐 행인 없이 그저 휑합니다.

 C슈퍼마켓으로 가는 길, 행인을 무시하는 현대자동차 택시들을 피하며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얼핏 한글을 본 듯했습니다. ‘한중서예명가초대전’. 강풍에 펄럭이는 플래카드 밑에는 감각적 외관의 한국문화원이 숨어 있습니다.

 한참을 머뭇거렸습니다. 덥수룩한 수염과 대충 걸친 옷차림도 그렇고, 식탁 위로 옮겨진 일감들도 부담입니다. 그보다는 긴장감이 풀어질 것이 내심 두렵습니다. 그런 모양이 못내 안쓰러웠는지 회전문 사이로 온기담은 묵향(墨香)이 선뜻 마중 나와 망설이는 발길을 이끌었습니다.

 먼지투성이 구두굽이 왜 그리 따각대는지 걸을 때마다 면구스러운데, 벽면을 채운 대가들의 필묵은 한없이 너그럽습니다. 심붕 유예 장해 왕단과 주상림 구극양으로 이어지는 중국서예의 형상을 초월하는 미의식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화선지 위에서 경계없이 비동(飛動)하는 그들의 서법(書法)과, 흑백 농담(濃淡) 강유(剛柔) 장단(長短) 정사(正斜)가 대립하고 통일되며 빚어내는 아우라는 추레한 방문객을 압도합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감흥에 흠뻑 젖어 들었습니다.

 얼마 전 객지에서 처음 생일을 맞았습니다. 그날 밤 왕징의 작은 어묵집에 모여 직원들과 조촐한 생일파티를 했습니다. 청심환을 챙겨야 하는 고된 행군 속에서도 모처럼 즐거운 한때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마음 한구석에 뭔가 무거운 덩어리가 느껴져 내내 힘들었습니다. 살 날이 살아온 날보다 짧아진 반백(半百)의 초조함이나 이뤄놓은 게 별로 없다는 삶의 회한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소병인의 일필휘지 앞에서 마음속에 복잡해 잠시 소파에 걸터앉습니다. 10년 전 풍광이 빼어난 캐나다 밴프에 다녀온 후에도 이런 유의 감정에 빠져 한동안 힘들었습니다. 대자연의 실체를 목도하면서 삭막하고 치열한 도시의 삶이 무의미해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화가출신 가이드처럼 무작정 이민갈 용기는 없으니 그저 시간이 흘러 잊히길 바랄 따름이었습니다.

 물론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며, 삶의 현명함이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잘하는 것을 택해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여 한때 인생을 걸려 했던 음악은 물론이고 평생 곁에 두고 싶던 미술과 서예를 외면한 채 취재 경쟁 속에서 17년을 보냈습니다.

 언론계를 떠날 때도 갈망하던 두 번째 밴프 여행은커녕 하루의 쉼도 없이 곧바로 가혹한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일에 대한 강박은 내 인생의 동력이었고, 그렇게 다시 8년째입니다.

 흔히들 인간이 자연에서 멀어질수록 몸이 편해졌지만 그만큼 마음은 불행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과의 물리적 거리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첩첩산중의 사찰이나 수도원에서도 인간적 고뇌가 많은 걸 보면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0여년간 올림픽도로를 달렸지만, 어느날 조수석에 앉았을 때에서야 처음 한강의 아침풍경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세상의 낯섦에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자연의 반대말은 도시가 아니라 집착이며, 오로지 앞만 보고 질주하는 운전자의 강박일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오십은 하늘의 뜻을 어렴풋이나마 헤아릴 수 있는 나이인가 봅니다. 안내원이 건넨 차 한잔을 들고나니 번민이 그 나름 정리되고 마음이 조금은 편해집니다. 전시장 바닥에 짐이라도 내려놓은 것 같습니다.

 전시장을 떠나기 전 한국작가의 작품을 마주했습니다. 제 답이 그르지 않다고 다독여주는 글 같습니다. 연당 지은숙의 작품을 옮깁니다. ‘과거를 기억하지 말고 미래를 갈망하지 말고 오직 현재에 머물라 언제나 빈 마음으로’

◆주태산 맥스무비 대표 <베이징에서, joots@maxmovi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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