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언론에 ‘20 대 80 사회’라는 말이 회자하면서 마케팅 용어인 ‘파레토 법칙(pareto’s law)’이 새삼 주목을 끌고 있다. 매출의 80%가 핵심 고객과 상품 20%에서 나온다는 이 법칙은 그동안 마케팅계의 정설로 또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경제용어 중 하나로 자리 잡아 왔다. 흔히 쓰이는 ‘선택과 집중’이란 말도 결국 소수의 핵심과 다수의 비핵심을 구분한다는 점에서 파레토 법칙과 맥락을 같이한다.
소수를 선택해 집중한 파레토 법칙이 있다면 다수의 의미를 재발견한 ‘역(逆) 파레토 법칙’도 있다. 2004년 말 미국의 한 잡지 편집장이 이름붙인 이른바 ‘긴 꼬리(the long tail) 법칙’이다. ‘롱테일 법칙’은 파레토 법칙이 간과한 80%에 주목했다.
온 세상을 연결한 인터넷시대에 이 80%는 20%에 못지않은 구매력을 보여준다. 전혀 없던 시장도 새로 만들어낸다. 더욱이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모두 능동적이다.
적은 판매량을 가진 다량의 물건이 모여 규모의 시장을 형성한다는 원칙을 강조하기 때문에 ‘80%의 반란’ ‘사소한 다수(trivial many)’라고도 불린다. 상품 경제에 인터넷이라는 변수를 집어넣으니 이렇게 상황이 바뀌었다.
‘롱테일 법칙’의 성공사례는 많다. 세계 유수의 인터넷서점인 아마존닷컴이 일 년에 몇 권 안 팔리는 80%의 책으로 많은 수익을 올렸고 영세 중소사업자와 소비자를 연결해 급성장한 이베이도 이 법칙을 따랐다. 구글이 대형 광고주가 아닌 꽃배달업체 등 영세 광고주를 모아 큰 수익을 거둔 것도 다수의 ‘안 팔리는 상품’과 ‘안 오는 고객’에 집중한 덕분이다.
소수의 핵심과 다수의 비핵심. 파레토 법칙이 전자를 중시하고 롱테일 법칙이 후자를 중시하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면 고객을 수동적 존재로 인식했다는 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와 관련해 최근 고객을 생산과 참여, 정보공유의 주체로 인식하는 마케팅 방식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고객과 콘텐츠가 여전히 미래 비즈니스의 화두라는 측면에서 신기술의 경연장인 ‘컨버전스’ 시장이 도입에 적극적이다.
IPTV도 그중 하나다. TV를 비롯한 기존 미디어 시장에서 시청자는 방송사나 콘텐츠 제공자의 취사선택 범위 안에 있었다. 소비자 선택권이 수동적이었고 따라서 이른바 잘나가는 콘텐츠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블록버스터의 확대재생산도 그래서 가능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IPTV 환경에서는 잘 안 팔리는 콘텐츠라도 중요하게 취급된다. 나아가 아예 고객이 콘텐츠를 생산하기도 한다.
최근 IPTV에 폐쇄이용자그룹(CUG) 개념을 결합한 새로운 서비스가 등장했다. 특정 이용자집단에서 특정인이 원하는 콘텐츠를 올리면 CUG 구성원이 이를 활용할 수 있다. IPTV 업체가 플랫폼을 제공하면 소비자가 주인이 돼 원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개념이다.
예컨대 어떤 회사가 IPTV를 이용해 CUG 환경을 마련해 놓았다면 그 회사 직원과 고객은 TV 속 공간에서 유익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된다. 사내교육·사내방송 등 활용방안도 각양각색이다.
또 중고차를 팔고 싶으면 관련 동영상을 IPTV 쇼핑 메뉴에 올려 자신만의 사이버장터를 연다. 옷이나 가구 등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상거래가 동영상 기반의 IPTV 안에서 구현되기 때문이다.
이제 IPTV는 ‘사소한 다수’의 다양한 기호를 소중한 고객으로 끌어들이는 무대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고객과의 소통의 장이자 고객 참여의 플랫폼이 IPTV의 현주소다.
그런 점에서 적어도 IPTV 시장에서는 전통의 20 대 80 법칙이나 롱테일 법칙만으로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듯하다. 이제 고객은 콘텐츠의 주체이자 생산자다.
◆김진하 <하나로텔레콤 부사장> danielkim@hana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