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고맙습니다. 페트로프 중령"

 날짜도 기억나요. 2001년 12월 14일 토요일. 해리포터 시리즈 1탄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개봉되던 날이었죠. 연중 최대 대목인데 개봉 전날부터 예매시스템이 버벅대기 시작했어요. 예매가 폭주하자 DB서버를 비롯한 장비들이 과부하로 문제를 일으킨 거죠. 밤새 고민한 사장에게 시스템관리자가 이런 해법을 내놓더군요.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됩니다.” 그 한마디에 기가 죽었어요. 선배도 아시다시피 당시 회사는 월별 손익분기점을 가까스로 넘긴 상태라 고가 장비를 맘껏 구매할 형편이 아니었거든요.

 그 말이 전혀 틀린 건 아니잖나. 하루인들 장비 없이 웹이 잘 돌아가겠는가. 남들은 PC 몇 대만 놓고 인터넷회사를 하는 줄 알지만 서버 관리를 대행해 주는 IDC의 엄청난 장비를 보면 인터넷사업은 굴뚝산업·장치산업과 다를 바 없지.

 물론 돈이 다는 아닐세. 영화 ‘본 얼티메이텀’을 보니까 CIA 국장이 등장하던데 이 보직은 없어진 지 오래야.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가 확실한 사실이라는 CIA 국장 말만 믿고 전쟁을 했다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나자 2004년 부시가 아예 국장 자리를 없앴지. CIA의 무능은 최첨단 하드웨어·소프트웨어에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지만 ‘인간간첩’과 각종 시스템을 운용할 전문인력, 즉 라이브웨어(liveware) 양성은 등한시한 데 따른 것이었네.

 지난 여름 엉터리 일기예보 때문에 낭패본 사람이 많던데 500억원짜리 슈퍼컴퓨터를 도입한 뒤 오히려 특보정확도가 더 떨어졌다는군요. 기상청은 소프트웨어인 수치모델 탓이라고 했죠. 지난번 재정경제부도 상반기 통합재정수지가 6조원 적자라고 발표했다가 11조원 이상 흑자로 정정했죠. 디지털예산회계시스템의 오류로 17조원이 차이난 것이라고 하더군요.

 맞네. 서툰 목수가 연장 탓하는 법이지. 아까 내가 라이브웨어가 중요하다고 했네만 시스템관리자는 시스템맹신에 빠져서도 안 되네. 시스템을 상시적으로 점검하는 데 그치지 말고 그 속성을 파악하고 시스템을 자기 것으로 장악해야만 하는 것일세.

‘馬七人三’이라는 경마격언을 들어봤나. 경주에서 말이 7할, 사람이 3할의 영향을 미친다는 건데 그만큼 기수의 능력이 중요하다는 뜻일세. 동일한 경주마라고 해도 통산 1300승을 올린 ‘국민기수’ 박태종이 타면 배당률이 뚝 떨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어느 기자가 박태종 기수에게 물었네. 20여년 말을 탔으니 말의 눈빛만 봐도 알지 않겠냐고. 그랬더니 그가 이렇게 말했지. “어찌 눈빛만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만져보고 타보고 함께 움직여보기 전에는 저도 잘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예를 들어봄세. 1983년 9월 26일 0시를 조금 넘겨서 옛 소련 비밀핵벙커 컴퓨터 시스템에 비상경보가 울렸네. 미국 핵미사일 한 개가 소련을 향해 발사됐다는 내용이었지. 핵전쟁 ‘개시’ 버튼이 깜빡이기 시작했고 후속 미사일이 하나씩 차례로 발사되고 있다는 위성경보가 이어졌네. 이제 8분 후면 첫 번째 핵미사일이 소련에 도달할 급박한 상황이었지.

 자네가 관리책임자라면 어찌했겠나. 관리자 매뉴얼에 따라 경보내용을 최고지도부에 즉각 보고했을 것이네. 불과 3주 전 KAL007기 격추사건이 발생한 시기였으니 어느 관리자가 머뭇거렸겠나.

 하지만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중령은 달랐네. 당일 시스템관리 책임자였던 그는 반사적으로 시스템정보부터 판단했지. 당시 양국은 상대방이 핵무기로 선제공격을 하면 전력을 총동원해 상대국가를 초토화시킨다는 ‘상호확증파괴’ 전략을 갖고 있었네. 따라서 미국이 도발하려 했다면 소련의 반격이 불가능하도록 핵미사일을 한꺼번에 대량발사했을 것이란 게 그의 분석이었네.

 페트로프는 곧바로 최고지도부에 위성경보가 잘못된 것 같다고 보고했지. 반격은 이뤄지지 않았고 잠시 후 경보는 위성시스템이 구름에 반사된 햇빛을 적의 미사일로 오인했던 때문으로 밝혀졌네. 시스템을 장악한 한 젊은 관리책임자 덕분에 인류가 불의의 핵전쟁을 모면한 셈이지.

참, 한 언론사 사이트를 보니 재경부 관련 기사 밑에는 “깜도 안 되는 사람들이 나라살림을 맡았나”는 댓글이, 페트로프 중령 기사에는 “고맙습니다”란 댓글이 달려 있더군. 부디 자네는 시스템투자에 그치지 말고 ‘깜되는’ 훌륭한 관리자를 키워 네티즌으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듣길 바라네.

◆주태산 <맥스무비 사장>joots@maxmovi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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