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업에 가장 중요한 건 현장입니다. 반면 한국은 기획과 재무에 더 무게 중심을 두는 듯합니다.”
다카스기 노부야 서울재팬클럽(SJC) 부회장(66)은 경제계의 ‘지한파’로 통한다. 한국 경영자보다 더 한국 산업과 기업을 잘 아는 일본 경영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에 온지도 햇수로 10년째다. 지금은 부회장으로 물러나 있지만 재팬클럽 회장을 3년 연임할 정도로 한국·일본 양쪽 모두에서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다. 역대 회장 중 3년 ‘장기 집권’한 인물은 그가 유일하다.
“일본과 한국의 기업 구조는 비슷합니다. 하지만 경영 스타일은 상당히 다릅니다. 한국은 ‘예스’ ‘노’가 뚜렷하고 즉석에서 의사 결정이 이뤄집니다. 때로는 경영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결단을 내리기도 합니다. 이런 속도 경영이 한 때 일본 전자업체를 앞지른 원동력이었습니다. 대신에 차근차근 중장기 전략을 세우기 보다 단기 성과에 집착하는 게 약점입니다.”
그는 일본 기업은 한국 기업과 “다르다”고 강조했다. “일본 기업은 가능하면 전원 합의를 추구합니다. 이 때문에 ‘3현(現)주의’가 모든 업무의 기본 전제입니다. 3현주의는 ‘현장’에 가서 ‘현물’을 직접 확인하고 ‘사실(현실)’ 데이터를 기본으로 의사 결정을 내리는 방식입니다.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고 언뜻 한국인이 보면 답답해 보이지만 이런 꼼꼼함이 결국 세계 최고의 제조업 경쟁력을 일궈냈습니다.”
다카스기 부회장은 지난해까지 회장 자격으로 재팬클럽을 이끌었고 지금은 다시 부회장(부이사장)으로 ‘직위를 낮춰’ 활동할 정도로 한국과 일본의 경제 교류에 관심이 많다. 게다가 올해는 재팬클럽이 설립 10년을 맞는 뜻깊은 해다. 재팬클럽은 ‘암참 (AMCHARM)’으로 불리는 주한미국상공회의소, 주한유럽상공회의소와 함께 국내 3대 외국 상공회의소로 불린다. 97년 서울 일본인회, 서울 상공회, 서울 조인트벤처(JV)가 합쳐서 정식으로 발족했다. 재팬클럽은 344개 법인 회원과 개인 회원 1800명을 두고 있다. 매년 이 숫자는 증가 추세다. 회원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한·일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계 기업 중 미국 다음으로 많은 게 일본 기업입니다. 문화·사회적으로 다소 거리감이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미국보다 더 가깝습니다. 초기 한국이 주력 산업으로 전자 분야를 꼽고 제일 먼저, 제일 많이 벤치마킹한 게 일본이었습니다. 이제는 삼성과 LG전자 같은 글로벌 기업이 나오면서 한국 기업이 일본의 경쟁자이자 파트너 관계로 부상했습니다.”
다카스기 부회장은 98년 한국후지제록스 전신인 코리아제록스 대표로 한국에 첫 발을 디뎠다. 지금은 일본 못지않게 한국이 소중한 나라지만 10년 전 한국행 비행기를 오를 때만 해도 낯설고 먼 나라였다.
“발령 통보를 받은 날, 솔직히 죽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끊어지고 외환 위기까지, 이미지가 최악이었습니다. 거기다 발령 받은 회사는 빚(부채) 투성이었습니다. 지옥이 따로 없었죠. 농담이 아니라 출발 전날 밤새 울었습니다.”
그렇게 싫었던 나라, 한국에서 그가 오자마자 마주친 건 노사 문제였다. 회사는 부실덩어리였지만 노조는 오히려 월급을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당연히 거절했다. 아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대신 사정이 나아지면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약속했고 끝내 이를 지켰다. 그러자 노조도 경영진을 믿기 시작했고 결국 회사를 수백억원 적자에서 3년 만에 흑자 구조로 돌려놓았다.
“그때 노사 관계에 가장 중요한 게 믿음이라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지금도 한국 기업은 직원과 경영진 사이에 불신의 골이 상당이 깊다는 생각입니다. 빈번하게 발생하는 노사 문제도 결국 서로 신뢰하지 못해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글로벌 비즈니스 환경에서는 기업 경쟁력이 핵심인데 노사가 싸울수록 득을 보는 건 경쟁업체입니다. 이를 명심해야 합니다.”
다카스기 부회장이 지금 개인적으로 가장 역점을 두는 게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이다. “일각에서는 일본과 한국의 경제 구조가 비슷해 FTA가 무의미하다고 합니다. 한국 경제가 일본에 종속될 것이라는 극단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단견입니다. 일본은 한국이 가진 활력을 활용하고 한국은 인력뿐 아니라 기술·정보까지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보다 튼튼한 경제 인프라를 갖출 수 있습니다. 게다가 두 나라는 미국에 맞먹는 시장 규모를 가져 매력적인 해외 투자처로 부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사실상 경영 일선에서는 물러나 있다. 아직 최고 고문 직함을 유지하고 있지만 언젠가 일본에 돌아가야 한다. “한국에 오는 일본 남자는 두 번 운다고 합니다. 한국에 오기 싫어서, 다시 일본에 가기 싫어서 운답니다.”
다카스기 회장은 자신도 두 번 울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며 마지막은 정말 아쉬워서 흘리는 눈물일 것이라고 말했다.
◆다카스기 노부야 부회장은
다카스기 노부야 부회장은 1966년 후지제록스 경리부에 입사한 후 최고 고문까지 40년 가까이 한 우물만 고집한 전형적인 일본 경영자다. 1996년 본사 재무부장을 거쳐 1998년 코리아제록스 대표로 한국에 왔으며 99년 한국후지제록스 대표 회장을 맡았다. 2005년 최고 고문으로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현재는 서울재팬클럽 부회장, 서울시 외국인투자 자문회의 자문위원, 인베스트코리아 자문위원, 국민은행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1999년과 2006년 대통령 표창과 산업포장을 수상했다. 한국 부임 초기부터 한·일 경제 교류에 관심이 많아 서울재팬클럽 우량 회원 중 한 명이었다. 정계와 경제계에 두루 지인을 두고 있으며 조석래 전경련 회장,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과 각별한 관계다. 한국에 온 지 10년 가까이 됐지만 한국말은 거의 못하며 대신에 영어는 유창하다.
강병준기자@전자신문, bjkang@ 사진=윤성혁기자@전자신문, sh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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