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칼럼]빠른 것이 미덕은 아니지만

방송관련법만큼 정부 각 부처 또는 이해집단 간에 의견이 크게 엇갈리는 분야도 찾아보기 힘들다. 워낙 이해관계가 충돌하다 보니 새로운 방송서비스가 제때 시청자에게 제공되지 못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지금은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일이 됐지만 위성방송 법제화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통신·방송위성인 무궁화위성이 이미 우주궤도를 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방송법에 위성방송관련 규정이 없어 위성방송사업자를 선정하지 못하는 해프닝이 꽤 오래 지속됐다. 많은 재원을 들여 쏘아올린 무궁화위성을 놀리지 않기 위해선 빨리 방송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비판적인 여론이 들끓었지만 방송법 개정 작업은 그야말로 요지부동이었다. 물론 온전하게 위성방송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으나 사람들의 진을 쏙 빼놓은 다음에야 방송법은 겨우 개정됐다.

 당시의 상황 논리를 무시한 채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것이 옳은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위성방송 법제화 당시 방송법 개정 논쟁이 지나치게 소모전으로 치닫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은 지금도 체증(滯症)처럼 남아 있다. 유감스러운 것은 위성방송 법제화와 같은 부류의 소모전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이다.

 최근 IT업계는 IPTV관련법·기구통합법 등 통·방 융합 관련법의 제정을 놓고 큰 홍역을 치르고 있다. 통신과 방송의 융합화 시대에 대비한 근거법을 마련하고 정부 기구를 통합하는 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만큼 합의를 이끌어낸다는 게 여간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려 7개에 달하는 IPTV관련법이 국회에 제안돼 심의 중이고 오래 전에 방송개혁위원회에서 논의됐던 방송통신위원회 문제가 또다시 장기전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답답하기 그지없다.

 이번 정기국회 상정을 앞두고 있는 방송관계법 가운데 ‘디지털방송 활성화 특별법’이란 것이 있다. 지상파TV의 디지털 전환을 촉진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데 대충 10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됐다. 지난한 과정이었다.

 지난 97년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지상파 디지털방송추진협의회’가 북미 방식(ATSC)을 지상파TV의 디지털 전송표준으로 정하면서 디지털 전환 정책은 순조로운 출발을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2000년 전송 방식 재검토 요구라는 복병을 만나면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 정도의 안개 정국이 펼쳐졌다. 결국은 전송 방식 해외 합동조사반과 필드테스트위원회가 정부에 구성되면서 합의점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지난 2004년 정통부 장관·방송위원장·언론노조 위원장·KBS사장의 4인 대표가 만나 전송 방식에 관해 전격 합의하면서 10년에 걸친 길고 험난했던 전송 방식 논쟁에 마침표가 찍혔다.

 하지만 디지털 전환 정책을 뒷받침할 법률적인 규정이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년 부터 정부 관계자와 각계 전문가가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도출해낸 법률안이 바로 ‘디지털방송 활성화 특별법’이다. 현재 법제처에서 법안 심사 중인데 조만간 국회에 상정될 예정라고 한다. 법제화가 완료되면 디지털 전환 정책에 법적인 권능이 부여되고 각종 디지털 전환 정책이 수립될 수 있는 촉매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모처럼 각계의 합의로 만들어진 법률안인만큼 이번 회기 중에 꼭 처리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만에 하나 이번에 처리되지 못하면 시행착오를 또 겪어야 한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빠른 것이 결코 미덕은 아니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진만 빼는 소모전이 미덕이 돼서도 안 된다. 비단 IT업계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장길수 논설위원 ksja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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