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 산은 황량하고 바깥 기온은 차지만 기분은 이미 봄을 찾아나선다. 오락가락하는 봄 날씨에 나무나 풀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수액을 뿌리에서 줄기로 올려 작은 싹을 틔우는 걸 보면 참으로 의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절대로 기 꺾이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니 말이다.
아래 지방에서 시작해 북으로 올라오는 꽃들의 개화 속도는 얼마나 될까. 부산에서 서울이 대략 450㎞고 벚꽃이 피는 시기에 약 15일간의 차이가 있으니, 하루에 30㎞씩 올라오는 셈이다. 사람이 천천히 걷는 정도다. 이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여의도·서울대공원·창경궁 등지에서는 사람잔치·벚꽃잔치가 열릴 것이다. 예전에 창경궁에서 벚꽃잔치가 열리면 퇴근길에 우르르 몰려가서 막걸리사발 기울이던 생각이 난다.
개나리꽃이 피었다가 지고, 그 자리에 새 잎이 돋아나올 때쯤이면 나는 ‘개두릅’을 따러 길을 나선다. 개두릅이라 하면 봄철에 ‘엄나무’에서 채취하는 새순을 말한다. 가시가 워낙 매서워 손으로 잡기조차 힘든 엄나무에서 나는 개두릅은 혈당을 떨어트려 고혈압 환자에 좋고, 각종 암세포의 성장을 억제하는 건강보조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가는 곳은 비봉이나 발안 근처 야산이다. 야트막한 야산에 올라가면 1∼1.5m에 이르는 엄나무가 즐비하다. 하나씩 따다가 주변 그늘에 퍼질러 앉아서 삼겹살과 함께 쌈을 싸먹는 맛이란 정말 형용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다가 시간을 내어 정선 5일장에 나가보면 높은 산에서 따온 개두릅을 내다 파는 할머니들을 볼 수 있다. 정선장 구경도 하고, 몸에 좋은 개두릅도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두릅도 여러 가지가 있다. ‘독활’이라고도 부르는 ‘땅두릅’은 나무가 아닌 다년생 풀에 속한다. 큰 것은 사람 키만 한데 밭가에 따로 심어 놓지 않으면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보통 두릅이라고 하면 ‘참두릅’이다. 줄기에 가시가 덕지덕지 붙어 있어 꺾기가 수월치 않다. 2∼3m나 되는 높은 곳에 있어 나무를 구부리는 과정에 가시에 찔리기 십상이다. 그래도 뭐니뭐니 해도 강원도 사람들은 개두릅을 더 쳐준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 중에 남자 성기 모양으로 생긴 것이 주로 정력에 좋다는 설이 있다. 뱀 대가리가 그렇고 자라 대가리가 그렇다. 그렇다고 꼭 동물만 있는 게 아니다. 식물 중에서도 찾을 수 있다. 버섯 가운데는 송이버섯이 그렇고, 두릅이 여기에 추가된다.
느린 걸음 속도로 오고 있는 봄. 5월 둘째주가 되면 강원도 정선 가리왕산으로 간다. 가는 길에는 평창 중앙시장에 들러 구워먹을 한우도 두어 근 사고 메밀전병에 메밀막걸리를 한 사발 마신 후에 슬슬 가리왕산 민박촌으로 간다. 가리왕산 민박촌은 소나무로 집을 지어서인지 자는 동안 내내 소나무 향기가 감돌아서 잠을 설치게 된다. 벽파령 1000고지 이상에 올라서면 참나물·곰취 향기가 가슴을 쿵쾅거리게 한다.
모든 식물은 일정한 환경 온도에 따라 개화 시기와 원인, 식물의 신진대사 속도가 달라진다고 한다. 식물 개화 시기에 영향을 주는 가장 큰 요인은 일조 시간과 기후 변화 등 외부 조건인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고려대학교 생명공학과 교수와 스페인·독일 연구원들이 식물 개화 시기를 조정하는 공동연구 결과를 발표해 주목을 끈 일이 있다. 이 연구 결과를 기초로 개인이 원하는 시기에 꽃을 피울 수 있는 일이 머지않아 현실화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왠지 개운치가 않다. 개화 시기와 개화 속도를 인공으로 조절할 수 있게 되면 아마 꽃 피는 설렘, 기다림과 기쁨은 그만큼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씁쓸함을 금치 못하겠다.
봄에는 우리 모두가 ‘새순’이 된다. 무딘 생각, 건조한 마음, 삭막해진 의상을 새로 갈아입고 새순처럼 맑은 ‘눈’을 틔우고 싶어진다. 올 봄에는 무거운 흙을 헤치고 대지 위로 힘차게 솟아올라 스스로 성장하는 파란 새순처럼 밝게 ‘희망’을 키우는 그런 봄을 기약해 본다. 어쨌든 나는 누가 뭐래도 개나리꽃이 질 때면 다시 개두릅과 곰취와 참나물을 뜯으러 강원도로 내달릴 것이다.
◆이덕근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중소기업지원본부장 dklee@kitech.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