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KCC 최대 위기
68년 이후 몇년은 KCC의 교육사업이 호조를 보이면서 비교적 경영이 안정됐지만 매달 월급날이 다가오면 잠을 설치곤 했다.
그런데 정말 위기가 닥쳐 왔다. 그 위기의 시발점은 H은행 컴퓨터센터(KBCC)였다. 당시 EDPS 사업은 KCC같은 전문업체가 컴퓨터를 임대, 은행·기업의 업무 처리를 의뢰받아 용역비를 받았다. 그런데 업무량이 늘어나자 고객들은 너도나도 자체 컴퓨터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기종을 잘못 선택하거나 용량이 남아 도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H은행은 은행이 공동 활용하는 통합전산센터 계획서 작성을 나에게 요청했다. 나는 즉각 작업을 시작했고 재무부 차관보 승인을 받아 KBCC(금융결제원 모체)가 탄생했다.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도와줬지만 결과적으로 내 발등을 내가 찍은 셈이었다. KCC는 일거리를 빼앗기게된 것이다. 또한 정부전자계산소·서울컴퓨터센터 등도 우후죽순으로 설립, KCC의 일거리를 뺏어갔다. KCC는 사면초가에 빠졌다. 그 동안 쌓아온 아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나는 한국 컴퓨터 분야의 산파 역할을 자임했고, 그 동안 줄타기를 하듯이 온갖 어려움을 헤쳐왔지만 직원들 봉급 지불조차 어려웠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긴급히 선언했다. “더 이상 버티기 어렵고 무작정 함께 일하자고 말하기도 어렵다. 부담 갖지 말고 가고 싶은 곳으로 자리를 옮겨라.”
이후 직원의 30∼40% 가량이 회사를 떠났다. 다행히 EDPS 업무를 처리하는 기업·기관이 늘어나 프로그래머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덕분에 직원들은 다른 곳에 안착할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 행운의 여신이 찾아왔다. 71년 중반경 유니백(현 유니시스)의 극동 담당 부사장이 나에게 직접 찾아왔다. “백지 계약서요. 당신을 유니백의 한국 책임자로 스카우트하고 싶으니 당신이 원하는 조건을 적어 서명해 주시오”라며 연봉 5만달러에 별도로 체제비·주거비도 지급한다고 했다. 당시 급여 수준으로 최고 대우였다. 일순간 어려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났다.
그러나 이 얘기를 아내에게 꺼내자 “그동안 한국에서 컴퓨터를 보급해보겠다고 칼을 뽑았는데, 지금 그만두면 당신은 패전지장이 되고 맙니다. 한번 시작했으면 사정이 어려워도 견딜만큼 견디고 끝을 봐야지요”라며 여성 특유의 강인한 면모를 드러냈다.
이에 나는 최종 결심을 굳히고 유니백코리아에 고문으로 일할 것을 제안, 연봉 10만달러를 조건으로 계약했다. 사실 68년 CDC 한국지사가 설립되면서 지사장 요청이 왔었는데 거절한 적이 있다. 그때도 초창기 세팅과 고문 역할을 해줬는데 고문료 대신 인맥 쌓기 차원에서 1년에 한 번 씩 CDC 회장과 점심을 하게 해 달라는 조건을 걸었다.
하지만 이번 유니백의 제안은 그런 조건을 내 걸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10만 달러라면 현재 100만 달러보다 훨씬 큰 돈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 환율이 두 배 가량 뛰어 가치가 2배 인상되는 효과까지 생겼다. 나는 감격했다. 나의 연봉으로 위기에 빠진 KCC를 구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KCC를 구제할 일이라면 어떤 모진 일도 감당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팔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너무도 눈물겹게 했던 것이다.
cylee@kc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