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심의기구 자율성은 존중돼야

Photo Image

‘음란물 판단은 사법부의 몫’이라고 못박으며 마치 영상물등급위원회(영등위)의 심의 결정을 무시해버린 듯한 법원의 유죄판결로 논란이 일고 있다. 급기야는 자율적 심의기구의 제도적 본질 및 존재 의의까지 의심받게 됐다. 이번 판결은 자율등급제를 지향해온 사회적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것으로 여길 수 있다는 점에서 몇가지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일각에서는 이번 1심 판단을 최초의 법원판결로 알고 있지만, 이미 지난 2004년에도 부산·의정부 등 지방하급심 선례가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자율적 심의기구 권한이라도 법원은 이를 초월할 수 있다는 법리적 기준을 대법원이 내렸던 것으로 오해하고 있지만 지난 1990년 영화 ‘사방지’ 관련 대법원 사건은 그런 판단은 아니었다. 공연윤리위원회로부터 적법한 심의를 받은 영화작품이 관람객 범위가 장소적으로 제약된 영화관 안에서 상영되는 것이라면 문제 없겠으나, 선정적인 포스터·스틸 사진 등을 따로 제작해 반포한 경우라면 영화작품 심의결정에 상관없이 그 포스터 등의 표현 방법 및 태양(態樣)에 대해 별도의 형사적 제재를 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이번 사건도 비디오물로 심의를 받아놓은 후 재편집해 포털사이트에 유포한 경우라 한다.

 여하튼 이번 유죄판결은 영등위를 비롯해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정보통신윤리위원회·한국자율광고심의기구등 여타 심의기구와 여러 콘텐츠사업자에 상당한 혼선과 불안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이번 사건을 두고 만약 자율적 심의기구의 결정이더라도 법원은 어느 때든지 그 우월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인다면 분명 자율적 심의제도의 본질을 심각하게 해칠 수 있다. 효력없는 등급심의 뭐하러 받느냐는 반발이 생길 수밖에 없다.

 독일 등 선진국에서는 자율규제기구가 행사한 실체적 권한자체에 대해서는 법원이 건드릴 수 없도록 돼 있다. 절차적 적법성 여부 등만을 심사하도록 돼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파문과 관련해 그 입법적 개선대안은 없는 것인가 (현행법상의 심의기구들이 과연 진정한 자율기구에 합당한지, 성인용 영상물에 대한 사법부 개입이 지나친 것은 아닌지 등은 접어두기로 하자). 여기서는 이번 형사판결로 야기된 사회적 파장, 즉 자율기구 심의권한과 사법부 판단간의 위계질서 여하만을 생각해보기로 하자. 먼저 자율적 심의기구의 실체적 권한 자체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종국적이어야 한다는 법 원칙을 명시해둘 필요가 있다. 이 때는 심의기구의 자율성·독립성·전문성·다원성 등 제반요건이 엄격히 갖추어져야 한다. 설사 심의결정에 대해 법원이 사후개입하더라도 그 예외적 기준과 한계를 미리 제시해두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절차적 대안도 강구해 볼 수 있겠다.

 신문의 자유와 기능보장에 관한 법률제21조(등록취소심판청구) 2항은 ‘음란한 내용의 정기간행물을 발행해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현저하게 침해한 때’에는 등록관청(행정기관)이 정기간행물에 대해 발행정지를 명하거나 법원에 그 등록취소의 심판청구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런 절차를 원용해 보건대, 어떤 심의기구의 심의결정을 번복해 버린 채 형사처벌쪽으로 가기보다는 자율적 기구가 내려놓은 결정을 존중하되, 청소년 유해성·음란성·사행성·폭력성 등에 문제가 있다면 관련부처 및 지방자치단체 또는 검사 등이 행정법원에 그 유통정지 신청 및 심의결정취소 신청을 제기하도록 보완해보자는 것이다. 신속한 가처분신청절차가 돼야 할 것이고, 음란성·사행성·폭력성에 대한 입증책임은 신청인측이 부담해야 할 것이다. 차제에 심의기준의 불명확성·비일관성등 사법당국의 불신을 해소할 수 있도록 심의기구의 운영상 미비점도 필히 정비해야 한다.

 더 나아가 원소스멀티유스 환경을 감안하여 심의기구 중복으로 인한 이중규제 문제, 매체유형 및 유통단계별 관련법의 상충기준까지 조화롭게 해결해야 한다. 심의를 받고 난 후의 조작변경을 통한 편법적 유통 등에 대해서는 더 엄하게 처벌해야 함은 물론이다.

◆박형상 변호사 law89@chollian.net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