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의 긴 역사를 모두 회고하고 기술하는 것은 지루하고 무의미한 일이다. 하지만 무협이 싹을 피운 당나라에서 진짜 무협이 시작되는 청나라 말엽으로 건너뛰는 것도 1천년의 세월과 전통을 무시하는 폭력적인 행위 같으니 간단하게라도 짚고 넘어가야 겠다.
애초에 무협이라는 문화가 성립한 근본에는 중국인의 상무(尙武) 정신과 행협(行俠) 정신이 있었다. 상무라는 건 무술, 무력을 숭상한다는 것이고 행협이라는 것은 협행을 좋아한다는 것이다.땅덩이가 넓고 이민족의 침략이 잦았던 중국에서는 황제니 천자니 하지만 그 힘과 통치력이 민간 깊숙한 곳까지 미친 일이 드물었다. 지방의 백성에게는 먼 수도에 사는 황제보다는 지방관이 훨씬 강력하고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런데 만약 이 지방관이 무도하기 짝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혹은 황제의 힘이 무력하기 그지 없어서 지방은 도적과 군벌이 횡행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힘은 스스로의 무력밖에 없다. 태극권의 발상지인 진가구, 팔극권의 발상지인 창주를 생각해 보라. 한 사람, 혹은 한 명의 명인으로 유명한 것이 아니라 마을 전체가 한 무술의 수련자들로 가득하지 않은가. 알고 보면 진가구, 그리고 창주의 무술전통은 마을의 안전을 위협하는 도적떼, 그리고 군벌들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한 자경단의 전통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전통 속에서 무술을 숭상하고 협행을 찬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들의 문화행위에 반영되는 것도 당연하다. 사기열전과 현대 무협소설, 그리고 현대 무협영화를 잇는 긴 역사에는 무수히 많은 문화행위, 혹은 양식들이 있었지만 간략하게 정리해 말하면 거기에는 소설, 연극, 그리고 이야기꾼이라는 세 형태가 있었다. 그리고 이것들은 그리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때로는 서로 섞여가면서 현대까지 이어졌다.연극의 대본이 그대로 소설이 된다거나 이야기꾼의 공연에서 읽혀지고, 또 그런 이야기꾼의 공연에서 덧붙여진 것이 문헌의 형태로 남게 된다거나 하는 일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우리가 즐겨 읽는 ‘삼국지연의’나 ‘수호전’, ‘서유기’ 등이 모두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역사를 간단하게 줄이면 무협은 사마천의 사기에서 시작해서 위진남북조 시대의 지괴, 당나라의 전기를 거쳐 송나라의 화본(話本), 원나라의 의화본(擬話本)과 잡극, 명나라의 백화소설(白話小說), 그리고 청나라의 공안소설(公案小說)로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송나라의 화본이라는 건 이야기꾼의 대본을 말하는 것이다. 송대 도시 사람들은 한가할 때 와사(瓦舍 : 기루)에서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설화를 들었는데, 이 이야기꾼의 대본을 화본(話本)이라고 불렀다.
무협소설의 전통은 이 시기에는 화본으로 이어졌는데, 이야기꾼이 주로 들려주는 네 가지 종류 중 하나를 소설(小說)이라 했고, 이 소설의 내용이 주로 박도(朴刀 : 무사), 간봉(杆棒 : 녹림)이 입신출세하는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원나라 때는 송대의 화본을 각색한 의화본(擬話本)이 창작되었으며 잡극(雜劇: 당시의 연극) 중에서도 무협과 관련한 것이 있었다고 한다.
명대에 와서 백화단편소설(白話短篇小說)이라는 것이 활발히 창작되었다. 백화란 읽고 뜻을 풀이해야 하는 고문(古文)과 달리 읽고 바로 뜻을 알 수 있는 구어체를 말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자로 기록된 서적과 한글소설(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언문소설)의 차이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다.
명나라 때는 많이 배우지 못한 평민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구어체의 소설, 혹은 연극대본이 유행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도 이 백화단편소설은 주로 이야기꾼이 찻집, 혹은 술집에서 공연하는 대본으로 창작되었다.
한편으로는 통속장편소설도 이 시기에 나왔는데 ‘삼국지연의’, ‘수호전’, ‘서유기’와 ‘금병매’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청나라 때 와서 공안소설이 등장한다. 이미 기술했듯이 근대적 형태의 소설로서 무협소설의 비조로 불리는 것은 청나라 광서 5년(1879년)에 출간된 ‘삼협오의(三俠五義)’라고 하는데 저자는 문죽주인(問竹主人)이라는 필명을 쓴 민간의 문인이었다.
‘삼협오의’는 본래 북경에서 야담가(野談家), 즉 이야기꾼 노릇을 했던 석옥곤(石玉崑)이라는 사람이 대본으로 썼던 ‘포공안(包公案)’을 120회로 편성하여 간행한 것이다. 그 내용은 송나라 때의 명재판관 포증(包拯), 즉 포청천(包靑天)이 억울한 사건을 맡아 협객의사들의 도움으로 불의를 처벌하고 공정한 판결을 내리는 이야기다.
이때 이후로 이것과 비슷한 통속소설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처럼 공안사건과 관련해 현명한 청백리 재판관, 그 재판관을 돕는 협객 등이 등장해 억울한 백성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이야기를 공안소설이라 일컫는다. 상기한 ‘포공안’을 비롯해 ‘시공안(施公案)’, ‘팽공안(彭公案)’등이 그 예들이다.이러한 공안소설에 먼 옛날 역수를 건너던 형가의 비장함과 다른 면이 있다면, 이 세계의 영웅들은 국가의 녹을 먹는 관리였으며, 협객으로서의 활동 외에 충의라는 개념과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앞서 예로 든 ‘삼협오의’만 해도 원래의 제목은 ‘충렬협의전(忠烈俠義傳)’이니, 황제를 암살하는 것으로 협의를 세우려 했던 형가나, 장님의 몸으로 친우의 복수를 하고자 했던 고점리와는 그 처지나 지향하는 바가 사뭇 달라 보이기도 한다.
청나라 때 이렇게 본격적으로 싹트기 시작한 다양한 근대 대중무협소설의 씨앗은 중화민국 건국 후로 이어진다. 개항, 서양 및 일본 문명과의 접촉으로 오랜 세월 세계의 중심에 서 있다고 믿었던 ‘중원’의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근대화의 격변이라는 고개를 넘어가는 시기였다.
청말 민국 초, 막 형성·발전하기 시작한 근대 도시들을 중심으로 근대적 형태의 무협소설들이 창작되고 읽혀졌다. 이때의 무협소설을 일컬어 ‘구파무협’이라고 하는데 북경과 천진을 중심으로 한 북파소설(北派小說)과 상해를 중심으로 한 남파소설(南派小說)로 분류한다.
북파의 중심인물은 왕도려(王度廬), 정증인(鄭證因), 주정목(朱貞木), 백우(白羽), 환주루주(還珠樓主) 등이고, 남파에는 평강불초생(平江不肖生), 문공직(文公直), 고명도(顧明道), 요민애(姚民哀) 등이 있었다.
이들이 있은 이후에 비로소 김용이니 고룡과 같은 작가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구파무협과 구분하여 신파무협(新派武俠) 작가라고 부른다. 여기까지 와야 비로소 우리가 아는 무협의 세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김용이 ‘규염객전’의 영향을 받았듯이, 중국 최초의 무협영화인 ‘화소홍련사’가 바로 저 구파무협 작가인 평강불초생의 작품을 원작으로 했듯이, 저 긴 역사적 전통을 생각하지 않고는 오늘의 모습 또한 제대로 알 수는 없을 것이니 간략하게나마 그 긴 역사를 짚고 넘어가는 이유가 그것이다.무협작가로 ‘대도오’, ‘생사박’, ‘혈기린외전’ 등의 작품이 있다. 무협게임 ‘구룡쟁패’의 시나리오를 쓰고 이를 제작하는 인디21의 콘텐츠 담당 이사로 재직 중이다.
<좌백(左栢) jwabk@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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