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다국적기업의 자화상

 ‘밀어내기’는 제조업체에서 매출을 늘리기 위해 유통업체들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과도한 물량을 넘기는 것을 말한다. 제조업체는 매출을 늘릴 수 있지만 유통업체들로서는 상당부분을 재고로 안게 돼 심각한 자금난을 불러올 수 있다. 이같은 밀어내기는 과거 가전업체나 PC 제조업체들이 실적발표를 앞두고 짧은 기간 안에 매출을 늘리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이용되어왔다. 그러나 최근들어 투명경영과 수익경영이 정착화되면서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과거의 유산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최근 시스템당 수백만원에서 수억원에 이르는 중대형컴퓨터시장에서 밀어내기 망령이 되살아나 시장을 휘젓고 있다. 하드웨어뿐만이 아니다. 기업 전산화에 들어가는 소프트웨어, 이른바 솔루션시장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외형 부풀리기에 급급하던 일부 업체들은 유통재고로 인해 심각한 매출부진에 허덕이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유통업체에 잠겨진 재고가 소진되지 않은 상황에서 본사의 매출을 추가로 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유통업체들은 유통업체대로 재고소진을 위해 덤핑경쟁·출혈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어 IT시장 전체가 혼돈의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은 이처럼 밀어내기로 매출을 늘리는 기업들이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세계 유수의 다국적기업들이라는 것이다. 일부 다국적기업들이 쉬쉬하면서 수억원대의 시스템이나 솔루션을 밀어낸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밀어내기 영업이 최근 이슈가 되는 것은 우선 장기적인 IT경기의 침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IT투자가 활발히 이뤄진다면 구태여 밀어내기 영업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물건을 받는 유통업체들이다. 다국적기업의 제품을 받아 영업을 해야 하는 전문 유통채널들이나 SI업체들은 전적으로 다국적기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물건을 인수해야 하고 수요가 없는 상황에서는 고스란히 재고로 안게 된다. 경영난에 봉착한 유통업체들로서는 반발이 없을 수 없다.

 밀어내기 영업뿐만 아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식적으로 지켜졌던 유통채널별 영역구분도 사라져 한 프로젝트를 둘러싸고 같은 회사 유통채널간 출혈경쟁도 다반사로 벌어진다는 것이 유통업체 관계자들의 공통된 불만이다.

 다국적 IT기업들이 한국에 들어온 지도 벌써 30여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말 그대로 한세대가 지나간 것이다. 한켠에서는 한국의 IT시장을 키워 자기들의 배만 불린 것 아니냐는 혹독한 비난도 적지 않지만 우리나라에 IT의 씨앗을 심고 이제는 세계 최대의 IT인프라 보유국가로 우뚝 올라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국내 기업들에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요하며 이를 통상압력수단으로까지 이용하는 다국적기업들이 이제는 국내기업들조차 꺼려하는 밀어내기 영업으로 매출목표를 맞추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국적기업의 지사라는 멍에로 인해 매출을 늘려야만 하는 숙명적 상황은 이제 세계 최고의 기업이라는 명예나 자존심마저도 내팽개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마저 들게 한다.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운 만큼 본사를 설득하고 상황에 걸맞은 목표를 세우는 것이 한국지사의 역할이다. 자신들의 과욕이 크면 클수록 한국 IT시장의 병도 커진다는 사실을 다국적기업의 한국지사들이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양승욱 정보사회부장 swy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