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성 군산대학교 전자정보공학부 교수 yschoi@kunsan.ac.kr
몇 년 전 일이다.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에 국내의 모 통신관련 기업이 교환기를 기증했다. 패킷교환기·미니컴퓨터·터미널·운용 소프트웨어에 케이블까지 완벽히 챙겨 보냈는데 대형 트럭 한 대 분량이었다. 몇몇 교수의 요청에 따라 신형으로 교체할 당시 폐기해야 하는 구형 장비를 학생 실습용으로 보냈는데 연구용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이 정도면 국내 대학의 재정으로는 구입이 쉽지 않은 물건들이었다.
과거 10년간 위정자들이 한 업적 가운데 칭찬받을 만한 것은 정보화에서 질풍처럼 달린 것을 빼놓고는 별로 내세울게 없을 듯싶다. 논란의 소지는 있지만 많은 국민 사이에서 회자되는 공감이 가는 견해다.
최근 외국 방문시 현지인들과의 대화에 자주 오르는 메뉴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한국의 정보화 수준으로 긍정적인 평가와 더불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정치·경제의 혼란상으로 대개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우리가 거둔 정보화의 성과를 잘 살펴보면 도외시한 부산물이 몇 가지 있는데 그 한 가지가 앞서 언급한 구형 통신시설들이다. 너무 급격한 변화로 인해 내구 연한이 지나서 구형이 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서비스에 밀려서 뒷전에 나앉은 장비가 상당히 된다. 앞서 언급한 교환기뿐만 아니라 인터넷이 x.25 기반의 PC통신을 완전히 대체했으며 5년 전까지 기세를 떨치던 ‘삐삐’라는 페이징 서비스는 거의 종적을 감췄다. 구미와 일본에서 아직 사용되고 있는 ISDN은 xDSL에 밀려 제대로 서비스도 못했다. 셀룰러 이동통신의 세대교체도 놀랄 정도로 빠르다. 음성통신에서도 VoIP가 급격히 아날로그 주도의 시장을 잠식하고 있으며, 보행자 전용 휴대폰 씨티폰은 시작과 동시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대체된 장비들은 다른 용도로 전용되거나 제3국으로 수출되기도 했지만 상당수는 수명을 채우지 못하고 폐기되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발생한 중고품을 북한으로 그냥 보내자는 주장은 아니다. 북의 빈곤을 핑계로 쓰다 남은 잉여물품이나 보내자는 발상은 더욱 아니다. 북한의 경제 재건은 튼튼한 민족경제 건설의 일환이며, 우리나라의 경제 부흥에도 큰 도움을 준다. 미국이 공황 탈출을 위해 후버댐을 건설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민족의 경제적 압박을 타개하기 위해 북한에 필요한 다양한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통일시대에 대비해 가보지 못하는 북녘의 지도를 펴놓고 통신 인프라를 설계하고 시뮬레이션하며 어떤 방식과 절차가 좋을지, 예상되는 비용은 얼마인지 추정해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런 연구의 상당부분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물거품이 되고 만다. 기술적 진보는 과거의 설계도를 무용지물로 만든다. 그래서 나름대로 터득한 철학이 있다. 북에는 북의 환경과 시대가 있다. 지금 이 칼럼을 달리는 기차 안에서 작성해 모바일로 전송한다고 해서 세상 모두가 그 수준이 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북한에는 북한의 상황 논리에 맞는 설계도가 필요하다. 그 답을 엔지니어의 손으로 작성할 수만은 없다. 정치도, 경제도, 외교도 나름대로의 답을 내놔야 한다.
이런 취지에서 어떤 제품과 서비스가 설사 우리나라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 해도 북한에서는 소용될 수 있다. 가령 개방적 인터넷보다 폐쇄적이고 문자 위주며, 보안과 통제가 용이한 PC통신서비스가 북한에서는 일시적 대안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여기에 필요한 하드웨어와 데이터베이스, 수백만 회원을 관리한 운영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다. 더욱이 이것들을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즉시 제공할 수 있다.
얼마 전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이용하던 한 PC통신회사가 문을 닫으니 더 이상 요금을 징수하지 않겠다고 엽서를 보내왔을 때 잠시 머리를 스친 생각이다. 첨단 아니면 통하지 않는다는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나 잉여 통신시설의 활용에 관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 바로 우리 옆에는 첨단이 아니라도 통할 수 있는 친구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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