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길수 디지털경제부 차장 ksjang@etnews.co.kr
시중은행 지점에서 간부로 일하고 있는 대학 동창을 오랜만에 만났다. 혹시나 해서 요새는 은행이 모텔이나 룸살롱 같은 숙박 및 유흥업종에 대출을 잘해 주지 않냐고 불쑥 물어봤다. 이 친구 대뜸 한다는 말이 “몇년 전부터 이들 업태에 대한 여신규제가 풀린데다 모텔 같은 숙박시설이나 유흥시설은 워낙 현찰장사라서 현금유동성이 풍부해 대출 우선순위에 올려놓고 있다”고 실토한다. “이들 시설은 손님 취향에 맞게 평균 2년에 한번씩 리모델링을 하기 때문에 자금수요가 많은데다 대출이자가 제아무리 높더라도 정해진 날짜에 빌린 돈을 꼬박꼬박 상환, 은행권이 선호한다”는 얘기다.
요즘은 현금흐름(캐시플로)이 기업의 건전성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다. 이 때문에 은행들은 회계법인이 공증한 재무제표라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기준에 맞게 현금흐름표를 재작성, 대출업무에 활용하고 있다는 게 이 친구의 설명이다. 그러면서 요즘은 사우나쪽에 대출수요가 많다고 토를 단다. 혹시라도 시중자금이 한국경제의 성장엔진이라고 일컬어지는 IT산업이나 제조업에 투자되지 못하고 유흥시설이나 숙박시설에 몰리는 기현상이 심화되지 않을까 걱정되는 대목이다.
평소 알고 지내는 코스닥 등록업체 Y사의 한 사장은 증시가 비교적 호황일 때 자사 주식을 담보로 금융권에서 거액의 자금을 대출받았다. 하지만 담보로 설정한 이 회사 주식이 폭락하면서 금융권의 상환 압력이 거세진데다 매출이나 영업이익도 생각만큼 신통치않아 현금유동성에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원금상환은커녕 매달 어김없이 돌아오는 이자부담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는 후문이다. 다행히 그동안 의욕적으로 추진해왔던 해외 프로젝트가 성사되는 바람에 자금융통에 숨통이 트였다며 어렵게 속내를 드러냈다.
비단 이 업체뿐이겠는가. 최근 IT경기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유동성 위기에 직면한 거래소 및 코스닥업체들이 1차 부도를 내거나 자본잠식 상태에 들어가 관리종목에 편입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시중에 현금유동성은 풍부한데도 정작 증시는 엄청나게 줄어든 고객예탁금과 거래량으로 활력을 찾지 못하고 있다. 현물시장보다는 선물·옵션시장에 투자자금이 몰리면서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현상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투자처를 찾지 못한 시중 부동자금은 증시를 떠나 채권이나 부동산 등 안전 자산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고 증시 전문가들은 진작부터 경고해 왔다.
우리는 IMF 금융위기 사태를 겪으면서 ’현금이 왕(cash is king)’이라는 말을 익히 들어왔다. 제아무리 매출이 늘어나고 영업이익률이 높더라도 외상 매출 채권이 제때 회수되지 않거나 물품재고가 창고에 대책없이 쌓여가면 운전자산에 비정상적으로 현금이 묶여 흑자도산하기 십상이다. 이같은 전후 사정 때문에 요즘에는 구멍가게를 하더라도 현금흐름이 중요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최근 증권사들이 제반 경제지표와 지정학적 위기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선 부채비율이 낮고 현금흐름이 양호한 기업에 투자하라고 권유하는 것도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바야흐로 현금유동성과 현금흐름이 또다시 중요해지는 계절이 왔다. 현금과의 처절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기업만이 경기회복기에 빛을 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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