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타워]사장님 사람 잘라 봤습니까

◆이택 IT산업부 팀장

“당신, 사람 잘라 봤어?”

얼마전 소위 잘나간다는 벤처기업가 몇 사람과 저녁을 함께 했다. 기자 역시 IT분야를 담당하다 보니 화제는 최근 경기 동향에 모아졌다. 의견은 다양했다. 미국의 IT경기 폭락 이유에서부터 다른 나라에 비해 미국 경기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는 한국시장의 맹목적 ‘대미 추종성’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자연스레 자신들의 경험담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기에 IT벤처를 창업해 숨가쁜게 달려온 기업가라는 동질감에서였을까, 이들은 아내에게조차 숨겨온 고민을 털어놓았다.

“얼마전 주총 때 정말 혼났습니다. 투자자라고 밝힌 사채업자, 심지어 유흥업소 주인들까지 터무니 없는 비방과 인신공격에 나서 난장판이 될 뻔 했습니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일부 주주들은 ‘사장이 주가 하락분을 물어 내야 한다’며 막무가내였습니다.”

기업인들은 억울해 했다.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사고 판 주식의 손실분까지 변상하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고 게다가 거품이 꺼지면서 적자를 보거나 주가가 폭락한 여타 기업들과는 달리 실적도 좋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날 식사 자리에 동석한 기업인들은 지난해 위기를 제대로 넘긴 건실한 ‘사장님’들로 평가받고 있었다.

하지만 기업인들이 정작 공감한 대목은 따로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경영이 무엇인지, 기업을 이끈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됐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명문대를 나와 번듯한 직장을 다녔고 자신의 능력 하나만을 믿고 벤처를 창업해 ‘성공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한마디로 세상 어려움 모르고 거침없이 살아 온 엘리트들이다. 그런 이들이 요즈음 난생 처음 기업가라는 자리의 무게를 되새기고 있다. 경기가 과열되고 모든 게 잘 풀릴 때는 몰랐지만 경제불안이 엄습하면서 ‘실패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 초조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다.

급기야는 가장 아프지만 가장 중요한 한마디가 던져졌다. “나는 요새 벤처 CEO들을 만나면 우선 ‘당신 사람 잘라 봤어’라고 질문합니다. 구조조정을 해보지 않은 기업가는 진정한 기업인이 아니라는 나름의 판단 때문입니다.” 그는 나날이 악화되는 경영환경 탓에 구조조정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감원 대상자를 선정하는 작업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고 제 피붙이를 잘라내는 것과 똑같은 아픔이었다고 고백했다.

감원 대상자를 떠올리면 그의 가족이 눈에 밟혀 도저히 해고 통보를 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사장, 혹은 기업인의 이름으로 어찌 한 가정을 꾸려 나가는 가장의 밥그릇을 빼앗을 수 있느냐며 감원은 ‘사람이 할 짓이 못된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닌 일’을 했고 심한 자괴감과 절망감에 시달리면서 오랜 시간 방황했다고 한다. 그래서 기업가로 불리려면 적어도 그같은 아픔을 한번쯤은 겪고, 앞으로의 경영에도 그 심정을 반영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요즘처럼 회사나 직원은 나 몰라라, 저 혼자 성공하기를 바라는 일회용 벤처 경영인들에게 ‘기업가’라는 호칭을 붙여 줄 수는 없다는 것이 그가 전하고픈 메시지였다.

벤처가 무슨 죄인이나 된 듯 몰아붙이는 요즈음 세태는 분명 잘못됐다. 한국 경제의 미래는 IT벤처에 달려있다. 전제조건은 벤처경영자들도 한단계 성숙한 기업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 이후 기자는 벤처CEO들을 만날 때마다 묻는다. “사장님, 사람 잘라 봤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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